더 북한 사설

식량지원 구걸과 김정철 호화 해외유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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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차남 김정철이 최근 싱가포르를 방문, 10여 일간 호화 유람을 즐긴 것이 포착됐다. 수행원 수십 명과 함께 특급호텔에 묵고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구입했으며 록가수 에릭 클랩턴의 공연을 VIP석에서 관람했다는 것이다. 또 중국과 마카오 등지에 체류하며 호화생활을 하는 장남 김정남의 행각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오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끼니도 제대로 못 이으며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볼 때 김정일 ‘로열 패밀리’의 사치 행각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더욱이 북한은 빈부 격차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회주의 국가 아닌가. 김정일 로열 패밀리의 행각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가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 주민들의 고혈(膏血)을 착취하는 왜곡된 체제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김정철의 외유는 이른바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인 2월 16일 직전인 지난 14일까지 이어졌다. 이와 관련, 3남인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되면서 형인 김정철이 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보신(保身)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마치 역사 드라마에 나오는 중세 왕조 국가의 왕위 계승 과정을 지켜보는 듯하다. 동시에 로열 패밀리인 김정철이 국가 최대 행사를 코앞에 두고 외유(外遊)하는 상황은 북한 권력체제에 무언가 나사가 풀려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후계자가 된 동생을 의식해야 하는 형 김정철과 김정남의 해외 호화생활은 북한 체제와 통치 시스템의 모순(矛盾)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북한은 최근 전 세계를 상대로 전방위적인 식량지원 요청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식량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나라나 국제기구가 어디인지 찾는 것이 훨씬 빠를 정도”라는 것이다. 이처럼 다급한 상황임에도 로열 패밀리를 비롯한 특권층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부패한 독재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북한은 신격화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해외에서 고급승용차 등 고가의 사치품을 들여와 주변의 가신(家臣)들에게 ‘하사(下賜)’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는 선진화된 민주국가의 웬만한 고위공직자들조차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정도의 호화생활을 보장해주는 식이다. 이를 위해 외교관들까지 밀수 등 불법적 활동도 마다하지 않고 외화벌이에 나서 ‘통치자금’으로 김정일 위원장에게 바친다고 한다.

 북한은 1~2년 전부터 국가합영투자위원회나 대풍그룹 등을 만들어 외자유치에 적극 나선 것으로 자주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성과는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소수 특권층의 부패한 사치생활을 위해 소중한 외화를 낭비하는 북한에 투자할 외국 기업이나 기관, 정부가 과연 얼마나 있을 것인가. 이율배반(二律背反)으로 가득한 북한 소식에 착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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