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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의 독과점화 어떻게 볼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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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초 미국 매체산업 사상 최대의 인수합병이 일어났다. 파라마운트 영화사와 M TV를 소유한 바이어컴이 미국 3대 공중파 방송의 하나인 CBS 방송을 무려 373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한 것이다. 이 인수―합병으로 탄생할 회사는 시가총액 680억 달러로 타임워너에 이어 세계 2위의 거대 미디어 기업이 될 것이다. 이러한 거대기업의 출현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강자에게는 반감을 가지지만 약자에게는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기초한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을 쟁취한 대통령 당선자의 환희보다는 선거에 패배한 야당 당수의 눈물에 연민을 느끼고, 거대기업에는 자신이 그 회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어도 거부감을 가지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중소기업에는 국민기업과 같은 친근감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언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끼는 경우도 심심찮다. 대중영화도 권력자와 부자보다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동정하고 응원한다. 《쥬라기 공원》에서 억만장자는 과대망상가로 그려지고 가장 먼저 공룡에게 습격당해 비참하게 죽는 인물도 은행의 고위간부다. 그 대신에 이상주의자로 그려지는 수학자는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영화와 방송산업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은 이 산업들을 경제적 관점보다는 문화적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디어 산업계의 기업 집중이 문화를 획일화하고 저급화할 뿐 아니라 더욱 심각하게는 민주사회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위협할 것이라는 ‘상식’을 신봉하는 지식인들의 우려 또한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공익의 이름 아래 보호되었던 방송, 통신 분야들이 탈규제되면서 합병 제휴 인수 형식으로 뭉치고 거대한 멀티 미디어 복합기업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공익, 사회복지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정보, 통신이라는 개념들은 사라지고 있다고 통박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미디어 산업의 기업 집중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거대기업에 의한 미디어 독과점이 산업 내부의 경쟁을 약화시켜 미디어 상품의 다양성을 감소시킨 다음 업계의 창의성을 위축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문화의 동질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독과점적 거대기업들의 담합으로 미디어 상품의 가격은 상승하여 소비자 주권은 약화되고 독점기업주들의 극단적인 경제논리는 억압적인 노동조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러한 독과점 비판이론의 장점과 유효성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편이다. 특히 공화당 지배의 미국의회는 통신법 개정 이외에도 금융 서비스 및 기타 산업에 대한 규제완화책을 연달아 통과시키면서 자칫하면 미국내의 부와 기업의 집중을 가속화시킬 뿐만 아니라 불평등한 대외 무역을 조장할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흥분은 금물이다.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 독과점 경제이론과 같은 고전적인 거대이론들이 산업의 모든 영역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게다가 한 산업을 잘 설명하는 특정 이론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그 산업의 모습을 여전히 해석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가깝다. 미디어 산업의 독과점 이론도 마찬가지다.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변화하는 세상을 설명하는 데는 헛점투성이다.

즉 미디어 현실은 독과점 거대이론의 추론과는 훨씬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오락-정보산업이 몇 개의 강력한 독과점 기업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의 영화산업은 메이저 스튜디오라고 불리워지는 5개 정도의 거대 기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방송산업은 이보다도 적은 3∼4개 사가 시장을 통제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양상은 거대이론의 설명과 상당부문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우선 산업내부의 경쟁이 약화되기보다는 강화되고 있다. 미디어 산업을 선도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다. 일간지에는 디즈니와 ABC 그리고 바이어컴과 CBS의 합병과 같은 대규모 거래들만 보도되지만 미국 미디어 산업에는 일주일이 멀다할 정도로 크고 작은 인수·합병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그래 봐야 동종기업들 간의 경쟁이라고? 천만에. 기존 미디어 산업의 거인들뿐만 아니라 MCA를 인수한 캐나다의 양조회사 시그램사나 바이어컴에 앞서 CBS 인수작전을 펼쳤던 전기·전자사인 웨스팅 하우스사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의 거의 모든 야심적인 기업가들이 이 세기말의 미디어 전쟁에 참가하고 있다. 게다가 여기에 이미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에 뛰어든 일본의 가전사들뿐만 아니라 필립스 등의 유럽계 기업들의 진출도 잦다.

정보와 오락의 다양성이 감소된다는 거대이론의 또 다른 주요 추론도 빗나가고 있다. 미디어 기업들간의 합종연횡에도 불구하고 채널 수는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만 가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의 다양성도 조금만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결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다른 어떤 국가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제도권 영화계가 우디 알렌, 마틴 스콜세지 같은 작가 영화들로부터 스파이크 리로 대표되는 흑인 영화를 거쳐 1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를 들이는 블록 버스터 영화를 동시에 만들고 배급하는 곳은 미국 할리우드밖에 없다. 창의성 문제만 해도 할리우드를 따라갈 영화산업은 없다. 영화는 구대륙 프랑스가 발명했지만 그 이후, 영상 테크놀로지의 진화인 발성영화, 컬러영화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 등은 모두 할리우드의 공적이다.

이제 독과점 미디어 이론의 최후 결론인 문화의 동질성 문제가 남아 있다. 이 문제는 아주 까다롭다. 동질성은 수량적인 잣대로 측정하기 힘든 질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미국영화는 자본주의 영화산업이라는 생산 모델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국 제일주의의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선전한다라는 주장은 선험적 추론의 가장 저급한 형태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의 영화는 자신의 정치, 경제, 문화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게 마련이며 그 또한 구체적인 증거, 즉 어떤 영화가 어떤 관객들에게 어떤 시점에서 무슨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주는지는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질성이나 동질화의 개념은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방색을 타파하기 위해 호남-영남 간의 동질성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나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남북간 동질성은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장들을 보면 동질성 개념이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동질성이라는 개념도 이렇게 상대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지만 거대 미디어 기업이 문화의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을 추구할 것이라는 주장도 탁상공론일 뿐 현실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문화상품의 다양성 정도는 생산자보다는 수요자가 정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월트 디즈니사가 가족―국가―노동 등과 같은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만화영화를 주로 만드는 데 반해, 디즈니의 자회사인 미라맥스는 틈새시장 공략을 생존전략으로 정하고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이나 요즘 미국 카톨릭 교단의 분노를 사고 있는 케빈 스미스의 《도그마》와 같은 주류 여론에 의해 ‘반미국적일 뿐 아니라 반사회적 영화’라고 지탄받는 영화를 틈만 나면 시장에 쏟아낸다.

그러면 왜 이렇게 미디어 독과점 이론은 산업시대 독과점 기업가들의 폐해를 들추어내던 과거의 영광에 무색하게 20세기 말 정보―오락 산업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을까? 그것은 우선 독과점 이론의 설정 자체가 작금의 미디어 산업 환경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독과점 이론은 한정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소수의 거대기업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한 산업이 그런 상황이라면 독과점 이론은 특별한 설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세기말에 전개되는 미디어 산업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오락과 정보 자원의 급격한 팽창에 직면하고 있다. 영상 테크놀로지와 정보 통신 기술의 급격한 발달, 즉 디지탈과 광섬유로 집약되는 신테크놀로지 혁명으로 미디어 산업의 영역과 자원은 비약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영상과 컴퓨터 산업 그리고 통신산업이 하나로 합쳐지는 미디어 융합 현상과 함께 위성 통신과 방송 기술의 등장으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가 개념이 약화되는, 말 그대로의 지구촌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사양산업으로 치부되던 영화산업은 기존의 극장 이외에 비디오와 기존 방송 채널을 거쳐 인터넷에 이르는 비약적인 배급채널 확대를 성공시켜 21세기 영상시대의 중심산업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즉 20세기 말은 오락과 정보의 테크놀로지가 아무도 그 미래상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 확산, 통합되고 있는 혁명의 시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독과점론이 오늘날의 미디어 산업의 거대기업화 현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현재 진행중인 독과점 기도는 중앙정부의 규제에 의해 통제되기보다는 탈규제에 의해 장려되는 편이 오히려 낫다. 왜냐하면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만드는 일은 기본적으로 커다란 위험을 수반하는 모험 산업으로, 관료적인 정부나 과거에 집착하는 고루한 학자들이 아니라 위기적 상황에서 기회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모험적인 기업가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험가들을 독점 자본주의자라고 비판만 한다면 CNN과 같은 가히 혁명적인 전세계적 뉴스 채널은 존립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진행중인 미국의 정보 초고속도로 계획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전 가정을 광섬유 케이블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최소 1천5백억 달러에서 최대 5천억 달러의 예산이 필요하다. 천문학적인 돈으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 학자들 대부분은 지금 그 계획이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5백 개의 채널을 과연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로부터 과연 그렇게 많은 정보와 오락 채널이 수익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 비판에 이르기까지 상식적인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 것이다. 즉 진정한 멀티미디어 시대라는 청사진에는 엄청난 가능성과 함께 또 그만큼의 위험성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무정부 상황에서 게임의 승부수는 독과점 기업가들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독과점 기업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비자를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 즉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대중적 창의성으로 무장한 1급 정보―오락상품을 만들어 배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비판적 미디어 학자들은 시대착오적이며 오만한 엘리트 주의자로 돌변해 현실을 거꾸로 해석해 버린다. 즉, 그들은 소비자들이 정보보다는 오락을, 고상한 고급문화보다는 저급한 대중문화를 선택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편견에 사로잡힌다. 그런 편견에서 우리는 관객들을 믿을 수 없기에 권력이 정보와 오락의 내용을 통제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다른 엘리트주의, 즉 우파의 문화관과 유사한 진보주의의 타락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대중이라는 미디어의 소비자들은 창의성 있고 다양한 문화보다는 저급하며 상투성으로 점철된 ‘통조림 문화상품’을 좋아하는 愚衆인가. 전통주의자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틀렸다. 그들은 우선 소비자들이 정보보다는 오락을 선호한다는 사실에서 세기말 문화의 절망을 발견한다. 그러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시청률을 시청자 수 뿐만 아니라 시청의 질을 함께 따진다면 시청률의 유구한 1위는 연속극이나 쇼 프로그램이 아니라 뉴스 프로그램이거나 시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정보와 오락 프로그램의 이분법도 프로그램의 융합 현상이 벌어져 ‘다큐―드라마’나 ‘인포―테인먼트’와 같은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있는 현실에 눈감고 있는 낡은 주장이다.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소비자들이 정말 필요한 심각한 정보보다 오락 프로그램을 선호한다는 주장을 만에 하나 받아들인다 해도 과연 소비자들이 오락을 통해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일까? 이런 주장은 우파적 엘리트주의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자율성이나 시민의 자유와 같은 개념까지를 혁명을 선동하는 불온한 정치철학으로 보았던 군주주의자나 근왕주의에 가깝다. 정보와 오락은 그렇게 쉽게 이분법적으로 설명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은 오락만큼이나 정보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또 그들은 오락 프로그램을 그저 현실도피를 위해 ‘소비적’으로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기 위한 ‘생산적’인 적극적 재창조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고전 독과점이론으로 무장한 미디어 비판론자들은 지금 산업계나 관객을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을 비판해야 한다. 현실은 기존의 모든 패러다임을 무효화하면서 변화하는데 그들의 닫힌 마음과 고루한 논리만 제자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 미디어 기업들의 출현이 시장 경쟁을 가속화시키고 그러한 경쟁이 소비자들에게 정보와 오락을 연결해주는 새롭고도 다양한 수단과 체계를 창조한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면 바이어컴의 회장 섬너 레드스톤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용기 있는 모험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강한섭 (영화평론가)

emerge새천년(http://emerge.joongang.co.kr/)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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