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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45] 미국 대법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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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지난해부터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원제: Justice)』가 한국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연방대법관을 저스티스(Justice), 즉 정의라고 부릅니다. 그저 말장난만은 아닙니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9명의 미국 대법관들은 헌법을 해석하고 법률에 대해 최종 판단을 내림으로써 정의와 도덕의 지향점까지 제시하기 때문이지요. ‘지혜의 아홉 기둥’, ‘미국을 이끄는 아홉 명의 법신(法神)’으로 불리는 미국 대법관들에 대해 살펴봅니다.

구희령 기자

대통령이 지명 … 죽기 전까지 신분 보장

미국 연방대법관들의 절대적인 권위는 ‘종신제’ 영향이 큽니다. 우리나라의 대법관 임기는 6년입니다. 임기 중이라도 정년(대법원장 70세, 대법관 65세)이 되면 물러나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 대법관은 임기도, 정년도 없습니다. 스스로 은퇴하거나 죽기 전까지는 신분이 보장되는 것이지요.

미국 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국민이 투표로 뽑은 대통령이나 의원들과 달리 이른바 ‘선출되지 않은 권력(Power without election)’이지요. 그러나 일단 대법관에 임명되고 나면 확고한 위상을 보장받습니다. 연임을 해도 8년밖에 집권하지 못하는 대통령과 달리 미 대법관은 수십 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90세로 은퇴한 폴 스티븐스 전 대법관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두꺼운 안경에 백발, 나비넥타이를 맨 한결같은 모습으로 35년 동안 연방대법원을 지켰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인 스티븐스 전 대법관은 7명의 대통령과 3명의 대법원장과 함께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법원 구성원이 좀처럼 바뀌지 않다 보니 미국에선 전원합의체 판결이 쉽게 번복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임기제 때문에 거의 매년 대법관이 1명 이상 교체됩니다. 전원합의체 판결도 자주 바뀌는 편입니다.

부시·고어·대결서 부시 당선에 결정적 역할

지난달 2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에서 셋째)이 신년 연설을 하기 위해 워싱턴DC에 있는 미국 의회에 도착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을 껴안으며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 오바마 대통령, 긴즈버그 대법관,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 [블룸버그]



미 대법관들이 내린 판결은 미국의 역사를 결정지어 왔습니다. 2000년 대선 당시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와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도 이들이었습니다. 논란이 된 건 플로리다주의 승부였죠. 미 대선은 간접선거 방식입니다. 한 주에서 한 표라도 더 나온 후보가 그 주의 선거인단 전부의 표를 얻게 됩니다. 25명의 선거인단을 플로리다주에서는 부시 후보가 몇백 표 차이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개표 과정에서 1만4000표의 무효 표가 나온 것으로 밝혀지면서 “수(手)작업으로 재개표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습니다. 플로리다주 개표 결과가 뒤바뀔 경우 고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었죠.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5대4로 “수작업 재개표는 위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선 35일 만에 부시 후보가 제43대 미 대통령으로 확정됐습니다.

미 연방대법원이 남북전쟁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1857년 “노예는 시민이 아니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남북 갈등을 사법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불을 붙였다는 겁니다.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재산권의 대상”이라고 봤던 19세기 대법관들의 보수적인 시각 때문이었습니다. 1953년 미 연방대법원은 흑백 분리에 대한 기존의 판례를 뒤집고 “미시시피 대학에도 흑인 학생이 입학할 수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대법관은 선출직이 아닌 만큼 국민의 여론에 영향을 덜 받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 대법원은 여성 인권 보장과 낙태 허용 등 사회 변화의 흐름과 국민 여론이 충실히 반영된 판결을 내려왔습니다. CNN의 법조 분야 해설을 담당하는 제프리 루빈은 그의 저서 『더 나인』에서 “만약 연방대법원 판결 사건을 국민투표에 부쳤더라도 같은 결론이 나왔을 것”이라고 단언했죠.

보수:진보:중도=4:4:1의 균형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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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지명에 있어 1순위로 고려되는 것은 이념적 성향입니다. 대통령과 그가 지명한 대법관이 같은 정당인 경우가 90%. 길어야 8년 재임하는 대통령이 자신이 남긴 정책적 유산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대법관을 고르는 것입니다. 진보 성향의 스티븐스 전 대법관이 “오바마 대통령 임기 내에 은퇴하겠다”고 밝히고 실행에 옮긴 까닭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현직 대법관은 존 로버츠(55) 대법원장을 비롯해 5명이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지명한 인물입니다. 한때 대법관들의 ‘공화당:민주당’ 비율이 7:2까지 간 적도 있지만 흥미롭게도 판결에 있어선 ‘보수:진보:중도=4:4:1’의 균형이 늘 유지돼 왔습니다. 대부분의 판결이 ‘5:4’로 결정이 났죠. 샌드라 데이 오코너(81) 전 대법관은 공화당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던 전력이 있지만 ‘중도의 여왕’으로 불리며 25년 동안 ‘결정적 한 표(스윙보트)’를 행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역·종교·인종 고려해서 안배 … 최근엔 꼭 그렇지도 않아

대법관 지명에는 ‘다양성’도 고려 대상입니다. 건국 초기에는 미국에도 지역 갈등이 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주 출신이냐’ 하는 것이 대법관 지명에 영향을 미쳤다는군요.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주 출신 대법관이 물러날 땐 역시 캘리포니아주 출신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압박을 대통령이 받았다는 겁니다. 물론 지금은 지역 안배 전통이 없습니다. 19년간 함께 대법원을 지켰던 윌리엄 렌퀴스트 전 대법원장(1986~2005년 재임)과 오코너 전 대법관(1981~2006년 재임)은 인구가 적은 애리조나주 동향이라고 합니다.

19세기부터는 종교가 대법관 지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른바 ‘가톨릭 몫’ ‘유대교 몫’으로 대법관을 두는 전통이 생긴 것이죠. 1836년 로저 토니 대법관이 ‘최초의 가톨릭 몫’으로, 1916년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이 ‘최초의 유대교 몫’으로 임명된 이래 가톨릭과 유대교 대법관이 1명씩은 꼭 있었습니다. 이들이 퇴임할 때 같은 종교를 가진 대법관을 대통령이 지명한 것이죠. 미국은 유럽의 개신교도가 종교적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너와 세운 나라입니다. 그런 만큼 개신교도가 절대 다수였기 때문에 종교적 다양성을 반영하기 위해 이런 배려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1949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가톨릭 대법관의 후임으로 개신교도를 임명하고, 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유대교 대법관의 후임으로 감리교 신자를 임명하면서 이 전통도 막을 내렸습니다. 자, 그렇다면 대법원이 개신교도 일색으로 바뀌었을까요. 정반대입니다. 현직 대법관 중 6명은 가톨릭, 3명은 유대교입니다. 지난해 마지막 개신교도인 스티븐스 전 대법관이 퇴임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후임으로 개신교도가 아닌 유대교도(엘리나 케이건)를 지명했습니다. 개신교도들이 세운 나라에서 개신교 대법관이 단 한 명도 남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사실 지난해 대법관 지명을 앞두고 갤럽에서 여론조사를 했답니다. 미국인의 66% 이상이 종교보다는 대법관의 가치관과 성향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는군요. 미국인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데 종교는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된 것이죠.

사실 종교적 신념과 판결 성향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지만 사형제를 옹호해 왔습니다. 윌리엄 브레넌 전 대법관(1956~1990 재임) 역시 가톨릭 신자이면서 낙태가 위헌이 아니라고 봤고요.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인종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최초의 흑인 대법관은 67년 서굿 마셜 대법관입니다. 그의 뒤를 이어 91년 역시 흑인인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이 지명됐고요.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최초의 히스패닉 대법관’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을 지명했습니다. ‘최초의 아시아계 대법관’이 나올 날도 머지않았는데요. 재미동포인 고홍주(55) 미국 국무부 법률고문도 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첫 여성 대법관은 81년 임명된 오코너

지난해 케이건 법무부 송무담당 차관이 사상 112번째 대법관으로 지명되면서 미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법관 트로이카 시대가 열렸습니다. 대법관 9명 중 3분의 1이 여성이 된 겁니다. 첫 여성 대법관은 81년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오코너 전 대법관입니다. 대법원 출범 189년 만이었지요. 그는 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을 임명할 때까지 12년 동안 대법원의 유일한 ‘여신’이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여성 대법관 트로이카 시대를 연 장본인입니다. 그는 2009년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 지난해 케이건 대법관 등 여성을 연거푸 지명했습니다. 오코너 전 대법관 퇴임 후 홍일점이던 긴즈버그 대법관이 고령에 암수술도 두 차례나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일까요. 새 여성 대법관은 모두 50대이기 때문에 당분간 여성 대법관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9명 중 4명은 여성이 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만약 오바마 대통령이 다시 대법관을 지명할 기회가 생긴다 하더라도 3명 연속 여성 대법관을 지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입니다.

미국 연방대법관은

정원 대법원장 포함 9명

임명 대통령이 지명한 뒤 상원의 인준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

자격 법률에 제한 규정 없음

임기 종신제(은퇴 가능)

정년 없음

역할 헌법 해석·연방 상고심 판결(우리나라 헌법재판관+대법관)

연봉 대법원장 22만3500달러(약 2억4740만원)

   대법관 21만3900달러(약 2억3680만원)

사건 연간 100여 건 심리(상고허가제를 통해 심리 사건을 거름)

※ 출처 : 미국 연방대법원(2011. 2)

‘전관 예우’ 받는 미 대법관들

미국 연방대법관도 ‘전관 예우’를 받습니다. 로펌에 취업하지 않아도 은퇴해서 명예롭게 살 수 있도록 현역 때에 버금가는 연봉을 정부에서 지급하는 거지요. ‘재임 중에 올바른 처신(good behavior)을 했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지만요. 은퇴하는 대법관 본인이 원할 경우에는 하급심인 항소법원과 지방법원에서 ‘시니어 판사’로 근무할 수 있습니다. 정부 예산으로 비서실도 꾸며주고요. 하지만 전관 예우를 못 받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렌퀴스트 전 대법원장처럼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대법관직을 포기하지 않는 대법관이 적지 않기 때문이죠. 임명 19년 만인 2009년 은퇴한 데이비드 수터 전 대법관에 따르면 대법관은 ‘최고의 직업’이니까요. 수터 전 대법관은 “다만 ‘최악의 도시(워싱턴DC)’가 싫어 떠난다”고 은퇴 소감을 밝혔습니다.

대법관은 자유롭게 은퇴할 수 있습니다. 오코너 전 대법관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남편의 곁에 있기 위해 2006년 대법원을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은퇴 뒤 남편은 곧 요양소에 가게 됐고 이듬해엔 아내를 까맣게 잊고 동료 환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오코너 전 대법관은 “남편이 편안해 보인다”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 전관 예우를 받기 위해선 나이는 65세 이상, 근무기간이 15년 이상은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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