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작 10여점 발굴

중앙일보

입력

일제시대 우리 서양화단의 대표적 작가 이인성(1912~50)의 미공개작 10여점이 대거 발굴돼 미술계가 잔잔한 흥분에 휩싸여 있다.

이중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오광수)이 지난 3년간에 걸친 조사 끝에 발굴한 32년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작 '카이유'는 지난 11일부터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미술 50년' 전에 공개돼 그 실체를 접할 수 있게 됐다.

발굴된 미공개작은 이밖에 유화 '단발머리 소녀', '복숭아', 수채화 '산사', '아기', 수묵화 '뱃놀이', '묵매' 등이 있는데, 20호 크기의 수채화 '카이유'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은 최근 삼성문화재단과 한국미술연구소가 공동으로 펴낸 '한국의 미술가-이인성'작업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특히 '카이유'는 일본에 있던 것을 국내에 들여와 일반이 관람할 수 있게 해 그 의의가 한층 크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은 지난 97년 초 우리 근대미술사를 정리하는 기획전인 '근대를 보는 눈'을 준비하는 가운데 우연히 일본에 있다는 이 그림의 소식을 듣게 됐다.

정준모 학예연구실장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선전 특선 후 일본 황실 궁내성(宮內省)에서 구입한 뒤 궁내성 승마교사로 있던 한 일본인이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아 2대째 물려내려온 것. 작품 뒷면에는 일본 유학 중 선전에 응모했던 이인성의 도쿄 주소가 적혀있다.

일본인 소장자와 친한 어느 재일교포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만나긴 했지만, 실제 구입이 이뤄지기까지는 넘어야 할 고개가 많았다.

우선 한국인 화가의 작품이지만 어쨌든 천황의 하사품을 한국으로 다시 내보낸다는 것을 소장자가 꺼림칙해했고, 미술관은 그를 설득하는 동시에 작품의 진위 여부 문제 등을 조사해야 하는 이중고(二重苦)를 겪어야 했던 것. 이때 해결의 열쇠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이인성의 유복자 이채원씨였다.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아버지의 유작을 모국 국립미술관에서 소장했으면 한다"고 간절하게 호소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이씨가 먼저 소장자로부터 사들인 후 미술관에서 정식 구입하는 것으로 낙착을 보게 됐다.

당시로선 대작급에 속하는 크기의 '카이유'는 쾌유(快癒)의 일본식 발음. 그림 속에 등장한 카라꽃의 꽃말이기도 하다. 수채화가로 널리 알려진 이인성의 출발점을 보여주고 있어 미술사적 가치가 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른 수채화 발굴작을 비롯해 이 작품이 갖는 미술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우선 지금까지 일반에 '사과나무', '여심' 등 유화로 더 유명했던 그가 고향 대구에서는 수채화가로 처음 출발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또 주로 풍경화를 즐겨 그리던 그가 요절하기 바로 전인 40년대에 시도했던 정물화의 시발점을 바로 이 32년작 '카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 발굴을 한층 빛내주고 있다.

이인성은 누구?

대구 출신인 이인성은 17세에 처음으로 당시 화가들의 최대 등용문이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차지해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단했다.

총기오발로 39세에 요절하기까지 불과 20여년의 짧은 그림 인생 동안 선전 입선 12번과 특선 6번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우는 등 탁월한 재능과 열정으로 30~40년대 우리 서양화단의 대표작가로 활약했다.

미술애호가라면 그의 유화 '가을 어느날'을 한번 쯤은 만나봤을 듯. 1백여점이 넘는 수채화와 유화 작품을 남겼는데 대부분 개인이 갖고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과 용인 호암미술관이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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