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만들어 갈 ‘正義의 잔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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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호 31면

모든 것이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모호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느 정도 불편을 느끼는가? 규칙적이고 계획된 삶을 더 편안하게 생각하는가? 자신이 내린 결정에 확신을 가지는가 아니면 우유부단해 좀처럼 끝까지 판단이 서지 않는가? 나는 어떤 판단을 내리는 사람인가? 이 의문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인 일상생활에서 늘 마주하게 되는 질문들이다.

미국 메릴랜드대 심리학과 크루글랜스키 교수는 사람에 따라 판단방식 패턴이 달라지는 정도를 알기 위해 인지적 종결 욕구라는 심리학적 척도를 개발했다. 이 욕구가 높은 사람일수록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확신에 찬 판단을 빨리 내린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질서정연하고 규칙에 따르기를 바라며 혼돈과 무질서함을 싫어한다. 이들은 빠른 결단을 위해 손쉽고 간단한 고정관념과 같은 단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반대로 이 욕구가 낮은 사람들은 좀체 판단에 이르지 못하고 망설인다. 때론 결론을 내지 않은 채 오히려 불확실한 상황을 즐기기까지 한다.

재판에서도 늘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판단이 빠른 판사와 그렇지 않은 판사가 있다면 재판 당사자 입장에서는 어떤 부류의 판사를 선호할까? 일반 시민들이 재판에 참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판단할까?

우리나라에서도 미국 배심재판과 유사한 국민참여 형사재판이 시행되고 있다. 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실제 재판과 똑같은 모의재판이 열렸다.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들이 모의배심원 역할을 했다. 필자가 속한 연구팀에서는 참여 시민들을 대상으로 인지적 종결 욕구 수준을 평가해 봤다. 이 욕구가 높은 사람들과 낮은 사람들로 배심원단을 따로 구성하고 같은 재판을 참관하게 했다. 두 그룹 간의 차이에 관심이 집중됐다.

배심원들의 동의하에 재판 후 토론(평의) 과정을 폐쇄회로TV(CCTV)를 통해 지켜볼 수 있었다. 인지적 종결 욕구가 높은 배심원단은 1시간30분에 만장일치 결론을 내렸다. 인지적 종결 욕구가 낮은 배심원단은 그보다 두 배에 달하는 3시간이나 토론을 벌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신속한 진행을 위해 일단 여러분의 유무죄 의견을 돌아가면서 한 분씩 말씀하시죠.” 배심원 대표가 된 6번 배심원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첫 말문을 열었다. 4번 배심원이 이 제의에 찬성했다. 그 순간 맞은편에 앉은 12번 배심원이 반론을 제기했다. “지금 너무 불분명한 것이 많은데요. 저는 유무죄에 관해 말씀드리기 곤란하네요. 결론부터 먼저 말하기보단 모르는 것들을 확실히 해 뒀으면 좋겠어요.”

옆방 모니터실에서 평의 과정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연구팀 사이에서는 탄성의 목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평범한 시민’들은 그렇게 논의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우리가 파묻어 놓은 사건의 쟁점 지뢰들을 찾아가 파내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각자의 결론부터 말하는 대신 증거를 연결 지어 사안의 쟁점을 먼저 분석하는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각자 내심의 결론을 짐짓 감춘 채 다른 배심원의 주장에 대해 자신이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정리해 내는 실력을 보였다. 여기서 사회자의 능숙성, 사회자를 보조해 토론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보조자의 역량이 돋보였다.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과업의 엄중함 앞에서 자신의 결론을 최대한 뒤로 늦출 줄 아는 지혜를 보여 줬다.

그것은 실로 고되고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그들은 진지하게 감당해 냈다. 남녀노소, 지식과 빈부의 격차와는 상관없이 동료 배심원들의 의견들을 정중하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대해 줬다. 토론 과정과 그들이 이끌어 낸 결론 모두가 경탄스러운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의(正義)의 잔치’였다.

처음 제도를 도입할 당시에는 불안감이 컸었다. 지난 3년간 321건의 참여재판이 열렸는데 긍정적 평가의 목소리가 높다. 판사와 배심의 의견 일치도도 90%를 넘는다. 재판을 주재한 판사들도 배심원들이 보여 준 진지함과 판단 수준에 놀라고 있다. 배심 판단을 존중하는 판결을 하는 것이 대세다. 참여재판으로 인해 형사재판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 다소 품은 들지만 신중하게 숙고할 수 있는 재판제도를 갖게 된 것은 선진국의 품격에 걸맞은 우리 모두의 승리다.
올해도 이런 재판이 전국 여러 곳에서 열릴 것이다. 배심 초청장을 받으신 것은 평생 한 번 있기 힘든 기회인 만큼 부디 이 잔치를 더욱 빛내 주시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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