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그들 손에 맡기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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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문창극
대기자

어떤 나라든 성장 발전 단계에 따라 두 고비를 만난다. 제일 먼저 만나는 고비는 민주화다. 그 후 만나는 고비가 복지문제다. 이 두 번째 고비를 제대로 넘겨야만 안정된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 물론 선진국이 되어도 이 문제는 계속 골칫거리다. 복지욕구와 현실의 능력 차이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의회제도 안에서 합리적 타협을 모색한다. 체제에 따라서는 민주주의보다 복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런 나라들은 민주주의도, 복지도 실패했다.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우리나라도 이제 민주화를 넘어 복지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들은 이류, 삼류 국가로 50년 이상 머뭇거리고 있다. 지금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도 과다한 복지지출로 국가 재정이 파탄 위기에 몰리고 있다. 우리 역시 이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한다면 그들과 비슷한 처지가 될지 모른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중요한 정책들이 정당 주도하에 국회를 통해 실현된다. 그런 점에서 복지 문제 역시 정당과 국회가 당연히 개입하고 주도해야 한다. 문제는 그 정당이나 국회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느냐다. 독립적인 야당이 존재하고 3권이 분립된 국회가 있어 제도로는 민주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데 그 기구들의 행태가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퇴영적일 때 어떻게 될까? 쉬운 예로 인사청문회를 보자. 행정부의 인사를 감시 감독하기 위해 생긴 이 제도가, 우리 국회에 도입된 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 좋은 제도라도 쓰기에 따라 어떻게 타락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청문회의 본래 의미는 퇴색하고 정당 간 권력투쟁의 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똑같은 연장을 써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일류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 삼류가 되기도 한다. 우리 정당이나 국회가 왜 삼류밖에 될 수 없느냐는 여러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서 접어 두자.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역시 우리의 정치유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미숙한 기구들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복지정책을 주도할 때 어떻게 될 것이냐다. 그들은 복지문제를 순수한 입장에서 제기한 것이 아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공짜 점심’으로 재미를 본 야당은 다음 선거를 겨냥해 ‘공짜 복지’ 시리즈를 내놓았다. 한나라당을 보면 더 한심스럽다. 보수정당이라면 보수주의 철학으로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보수주의는 개인이 주도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그 개인은 자기 일에 책임지는 독립적인 존재이지, 국가에 의지하는 의타적 개인이 아니다. 당연히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그 대가는 소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의 복지(welfare)는 ‘일하는 복지(workfare)’다. 작은 빵을 당장 분배하기보다는 큰 빵을 만든 후 나누자며 성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국가에 모든 책임을 떠 맡겨 큰 정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역동적인 정부를 추구한다. 한나라당은 이런 보수철학조차 망각하고 ‘70% 복지’니 하며 야당 따라가기에 정신이 없다.

 국가의 궁극적 목적이 온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라면 보수정권 역시 복지가 중요한 화두다. 그러나 무조건 혜택을 주기보다는 분수에 맞게, 빚 안 지고,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복지가 되어야 한다.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전선은 낙동강 전선이며 여기서 밀리면 부산까지 간다”는 말은 뼈있는 말이다. 그도 정치인이지만 지방행정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공짜 복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능력도 책임도 도외시한 정당 간의 선심경쟁을 걱정하는 것이다. 애를 써 돈을 벌어보지 않은 사람은 돈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남의 호주머니에만 의존하는 정치인들이기 때문에 쓰는 데만 더 골몰하는지도 모르겠다.

 복지논쟁의 또 하나의 문제는 사회갈등을 심화시키는 쪽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복지정책의 정신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는 부자들은 당연히 더 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받을 권리가 있다고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한쪽에게는 자기의 정당한 몫을 빼앗긴다는 박탈감만 주고, 다른 쪽에게는 타인의 노력에 의존해 살아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뻔뻔함만을 키워 준다. 도와줌으로써 기쁘고, 도움을 받음으로써 감사하다는 마음 대신에 빼앗기고 빼앗는 살벌한 마음만 키워 준다. 이런 사회라면 누가 열심히 일하고 싶겠는가? 버는 사람은 없고 쓰는 사람만 많아지면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책임감 없는 정당들이나 야심가들에게 복지 논쟁을 맡겨 놓을 수 없다. 재정이 파탄 나고 사회가 더욱 분열된 후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제 정부의 선제적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가 미래까지 감안한 청사진을 내놓고 시행을 신속히 해야 한다. 좋은 법은 지킬 수 있는 법이어야 하듯이 좋은 복지는 실현 가능한 복지다. 출산율을 높일 수 있는 육아지원, 인재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지원에 과감해야 한다. 포퓰리즘이라는 깊은 수렁은 우리가 발을 헛디디기를 고대하고 있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