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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비즈 칼럼

국가채무 논란, 왜 정치논리에 흔들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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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옥동석
인천대 교수

국가채무 논쟁은 12년 전인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 정부 시절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공적자금이 사실상 국가채무와 다르지 않다고 비판하며 국가채무 논쟁을 촉발했다. 당시 정부는 공적자금은 정부보증으로 조성됐고, 또 정부보증은 국제기준의 국가채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당시 보편적인 국제기준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재정범위는 일반회계·특별회계·기금 등 펀드단위가 아닌 기관 중심의 제도단위로 설정돼야 했다. 제도단위 기준으로 보면 공적자금은 정부보증채무가 아니라 직접채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제도단위 기준의 재정범위가 2001년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해 더욱 명확하게 규정되면서, 노무현 정부는 재정범위 개편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작은 정부 대(對) 큰 정부’ 논쟁으로 재정범위 설정이 매우 민감한 문제로 부각되면서 정부는 추가적인 개편작업을 중단했다. 이후에도 재정범위와 재정통계에 대한 논란은 꾸준히 제기됐으나, 정부는 한결같이 국가채무가 국제기준에 따라 작성되고 있다는 입장만을 고수했다.

 이명박 정부도 출범 초기 이 사안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야를 불문하고 국회의원과 전문가들이 국가채무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자 정부는 2009년 상반기 재정범위 개편작업에 착수했다. 드디어 올 1월 하순에 기획재정부는 제도단위 기준의 재정범위 개편 초안을 공식적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재정범위의 이러한 개편은 우리나라 재정통계를 한 단계 선진화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공공부문은 일반정부와 공기업으로 구성되는데, 재정범위는 원칙적으로 일반정부를 의미한다. 일반정부는 정책활동을 수행하는 기관들이고, 공기업은 기업활동을 수행하는 기관들이다. 따라서 이번 개편작업의 핵심은 공공부문에 포함되는 기관들이 수행하는 활동의 진정한 성격을 파악해 이들을 일반정부와 공기업으로 다시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정부의 기관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부 기업활동은 준기업으로, 또 공기업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부 정책활동은 준재정으로 구분해 이들도 재정통계에 반영해야 한다. 조만간 발표될 개편 초안은 새로운 논란거리를 다양하게 제공하겠지만, 이번 개편은 국가채무에 대한 지금까지의 거대담론적 논쟁을 미시 실용적 논의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국가채무 논쟁 과정에서 각 정당은 집권 여부에 따라 입장을 극명하게 바꿨다. 여당이 됐을 땐 재정통계 개편에 소극적이고 야당이 되면 적극적인 입장으로 변화한다. 이는 선거와 정쟁을 의식해야 하는 정치인들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여당 정치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독창적 회계를 통해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증가를 암묵적으로 방조한다. 그런데 이번 재정통계 개편 작업은 국제기구 등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국내의 건전한 여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이번 개편은 대통령제를 통한 견제와 균형, 그리고 야당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또 다른 교훈은 관료들의 정치적 중립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한 것이다. 국가채무와 재정범위의 개념적 문제점은 이미 수년 전부터 명확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관료들은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흔들리지 않는 굳은 기개를 갖추지 못했는가! 관료들이 정치적 중립성을 확고하게 지켰다면 국가채무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10년이나 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옥동석 인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