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에 먹이 끊겨 … 날개 꺾인 독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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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를 구하지 못한 독수리들이 20일 강원도 춘천시 서면 들녘까지 날아와 주변에 뿌려진 거름 주변에서 먹잇감을 찾고 있다. [춘천=연합뉴스]


“독수리가 떨어진다~.”

 19일 오후 5시20분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마지리 활터. 독수리(천연기념물 제243-1호) 한 마리가 2.5m 길이의 양 날개를 펼친 채 100m 높이 상공에서 원을 그리듯 활강하고 있었다. 그 순간 먹이를 채러 땅으로 내려오는 듯하던 독수리가 갑자기 땅으로 툭 떨어졌다. 힘이 빠져 추락한 것이다. 한국조류보호협회 한갑수(58) 파주시지회장이 바로 달려갔다. 기력을 잃은 독수리는 사람이 다가와도 날개만 펄럭일 뿐 도망갈 줄 몰랐다. 한 회장은 독수리의 날개를 잡아들어 살펴보더니 “탈진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민통선 내 장단반도(약도 참조) 월동지에 먹이가 부족해지자 독수리가 민통선 바깥으로 먹이를 구하려 나왔다가 탈진했다는 것이다.

 이날 이렇게 맥이 빠진 독수리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논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독수리는 활기를 잃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한 회장은 이렇게 생포한 독수리를 근처 감악산 기슭에 위치한 파주조류방사장으로 데려가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보살필 계획이다.

 구제역 탓에 독수리의 날개가 꺾였다. 구제역 방역을 위해 여러 사람이 모이거나 함께 움직이는 게 파주 일대에서는 금기시되고 있다. 이 때문에 예년처럼 많은 사람이 독수리 월동지에 들어가 먹이를 주지 못했다. 독수리가 배고파 힘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이유다.

 군사분계선과 3㎞ 떨어진 장단반도는 세계 최대의 독수리 월동지다. 1997년 2월 임진강 일대에서 독수리가 농약중독으로 떼죽음당하자 조류협회에서 군 작전지역인 이곳에 독수리 월동지를 조성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라 독수리가 살기에 적합하다.

독수리는 매년 10월 하순 2000㎞ 떨어진 몽골에서 이곳으로 날아와 이듬해 4월 초까지 머무른다. 조류협회는 정기적으로 이곳을 찾아 독수리에게 먹이를 준다. 현재 이곳에는 700여 마리의 독수리가 월동 중이다. 하지만 구제역 등의 여파로 월동지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지 못해 독수리의 먹이가 극도로 부족하게 됐다. 협회에 따르면 이번 겨울 들어 장단반도와 주변 지역에서 탈진해 구조된 독수리가 40여 마리에 이른다. 지난해 12월 14일엔 장단반도 인근 들판에서 농약중독으로 독수리 40마리가 떼죽음을 당했다. 월동지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한 독수리가 민통선 바깥의 민가 주변으로 나왔다가 농약이 묻은 볍씨를 먹고 죽은 기러기 등을 뜯어먹은 뒤 죽은 것이다.

한 회장은 “지난해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 매주 돼지고기 2t씩을 독수리 월동지에 가져다주었지만 이번 겨울에는 2~3명 정도만 들어가 한 달에 한 차례 1t씩 준 게 전부”라고 말했다. 이달 들어서는 9일 돼지고기를 조금 가져다준 게 마지막이다.

 김성만(65) 한국조류보호협회장은 “야생조류에 의한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독수리가 민통선 밖으로 나오게 하면 안 되는데 구제역 때문에 먹이를 충분히 주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파주=전익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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