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사건’이슈로 e-신문고 양날의 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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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울 동대문경찰서 정채민 형사과장은 아침에 출근하면 컴퓨터부터 켠다. 인터넷 여론 동향을 살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 인터넷에 경찰 수사를 요구하는 제보 글이 자주 올라오기 때문이다. 특히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등 네티즌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경우엔 더욱 관심 있게 살핀다. 억울한 사연이 적힌 글이나 폭행 장면을 담은 동영상처럼 증거물이 있는 때에는 경찰서 관할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닌지를 반드시 확인한다. 정 과장은 “일종의 첩보로 보고 강력팀 등에서 자주 활용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인터넷이 ‘신문고’의 역할로 진화하고 있다.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이 수사의 단초를 찾는 창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지하철 성추행 동영상, 길거리 폭행 동영상 등 인터넷 상에서 논란이 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인터넷에 제보 글이나 동영상이 올라오면 네티즌의 다른 사이트에 퍼 나르면서 공감대가 형성되고 수사가 시작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인터넷 신문고’는 수사기관을 견제·감시하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지난 7일 포털 사이트 토론 게시판에 “딸이 성폭행에 저항하다 숨졌고, 당시 함께 있던 남자 두 명 중 하나는 경찰 출신 친척이 개입하면서 무혐의로 풀려났다”는 글이 올라온 다음 경찰 재수사가 시작됐다. 충남지방경찰청 의경 가혹행위 사건도 비슷하다. 피해자의 어머니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자 경찰청이 대책을 내놓고 수사에 들어갔다. 실제로 이들이 올린 게시판에는 하루에도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사연만 200여 건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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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한국정보화진흥원의 김봉섭 박사는 “인터넷의 개방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며 ‘네트워크의 힘’이라고 요약한다. “인터넷이 권력자든 비권력자든 똑같은 목소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제도권에서 차단된 ‘감춰진 이슈’들이 주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제보 급증은 수사기관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경기대 이수정 교수(범죄심리학)는 “그동안 경찰이 범인을 처벌하는 데 급급해 수사 결과를 피해자 쪽에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며 “불신이 쌓인 피해자들이 열린 사이버 공간을 찾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인터넷 상의 여론 몰이에 오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11월 ‘어머니가 성희롱 수사과정에서 경찰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와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경찰청 수사과는 “모욕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담당형사를 대상으로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벌였다. 하지만 두 차례 모두 ‘진실’ 반응이 나와 무혐의로 수사를 종결할 방침이다. 실제로 서울 지역의 한 경찰 간부는 “인터넷 제보는 공개수사와 비슷하다. 결정적 제보는 거의 없고 열에 아홉은 주관적인 느낌에 그친다”고 말했다.

 경찰대 표창원 교수는 “수사기관이 여론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할 경우 수사력이 낭비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며 “선진국처럼 옴부즈만 제도를 활용해 신뢰를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려대 김문조 교수(사회학)는 “사법기관을 통해 처리해야 할 사건이 인터넷을 통해 공론화되면서 일종의 ‘사회적 거품 현상’이 빚어질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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