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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무상의료 논쟁, 탁상공론 안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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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허대석
한국보건의료연구원장·서울대 의대 교수

복지정책 논쟁이 ‘무상급식’에서 ‘무상의료’로 이어지고 있다. 무상의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입원진료비의 건강보험 부담률을 현행 62%에서 90%까지 높이고 진료비의 본인 부담 상한액을 100만원까지 낮추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비용을 ‘8조1000억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병원에서 환자들이 지불하는 의료비용이 어떻게 산출되는지 따져보면 ‘무상의료’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도 암과 같은 중증질환 환자는 이미 입원진료비의 5%만 비용부담을 하면 되고, 200만원 이상부터 소득에 따라 본인부담상한금제도로 지원받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환자들의 건강보험 보장률은 70%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의료기관에서 제공되고 있는 진료서비스와 약제에 대한 비용은 건강보험에서 보장하고 있는 급여비용과 환자 개인이 지불해야 하는 비급여비용으로 나뉘어 있다. 정부가 보장성 강화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부담금 비중에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신의료기술과 신약이 끊임없이 개발되면서 비급여 진료비용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로 갑상선암에 대한 표준 치료인 갑상선절제술의 수술비는 140만~240만원 수준이며 환자는 5%만 지불하면 되기 때문에 공식적인 수술비는 10만~20만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자들은 그 이상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으며, 만약 새로운 의료기술로 도입된 로봇을 이용한 갑상선암 수술을 선택한다면 수술비만 600만~900만원에 달한다.

 우리나라 총의료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6.5%(2008년)에서 매년 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10년 GDP 총액 1100조원을 기준으로 추정하면 총의료비는 71.5조원 수준이다. 본인부담비율 38%를 반영하면 27조원을 환자가 직접 부담하고 있으며, OECD 국가의 평균인 80% 보장만을 기준으로 실질적인 무상의료를 정의한다고 해도 1년에 최소 13조원 이상의 재원이 당장 필요하다. 문제는 총의료비가 OECD 국가의 평균인 9~10% 수준으로 상승하면, 보장성 강화에 18조~20조원, 의료비 증가분까지 포함하면 연간 총 40조원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서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1년 수명 연장에 최대로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을 조사한 결과 1900만원에서 1억2000만원까지 큰 편차를 보였다. 건강의 가치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무상이라면 고가의 새로운 의료기술을 요구하는 환자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의료비를 국가에서 무상 지원하는 의료급여 환자들의 의료비용이 보험환자들보다 높다는 것은 무상의료가 실시되었을 때 불필요한 의료재정의 낭비가 추가로 발생할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최근 발표된 ‘암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이 높은 그룹이 의료서비스를 더 자주 받고 건강의료보험의 혜택을 더 많이 받고 있다. ‘무상의료’ 정책이 서민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의료비용 지출의 ‘부익부, 빈익빈’을 더 심화시키는 정책이 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질병에 어느 수준의 의료 서비스까지 무상으로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상의료’ 비용을 논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건강보험이든 국고든 국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고, 마련할 수 있는 재원은 한정돼 있다. 아직 효용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고가의 신약과 신의료기술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현실에서 국민이 원하는 모든 의료행위를 무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나라는 없다. 국가 전체 예산의 20% 수준을 보건의료에 투입하는 무상의료제도의 영국 국민들도 보다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의료관광을 떠나고 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무상의료’ 정책을 교육제도에 비유하면 중등교육까지만이 아니라 대학교, 외국 유학까지도 국민이 원한다면 90%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교육에서 중등학교까지를 필수교육으로 정한 것처럼 객관적인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필수적으로 제공돼야 할 의료 서비스부터 정하는 것이 무상의료 논의의 전제조건이다.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필수 의료 서비스의 범위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다면 무상의료 논쟁은 의미 없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허대석 한국보건의료연구원장·서울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