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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가정교육이 힘이다 [상] 부모가 먼저 손을 내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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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강일구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라는 아이에게 뭐라고 말하실래요

“교복 입은 아이들이 제일 무섭다”는 어른들이 적지 않다.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내뱉고 아무에게나 시비를 거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평범해 보이는 학생들이 부모나 교사의 사소한 꾸지람에 거칠게 돌변해 욕설과 폭행을 일삼기도 한다. 열려라 공부팀은 청소년 인성 문제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가정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가정교육 시리즈를 마련했다.

박형수·설승은 기자
일러스트= 강일구

#“야, 너 내 방에서 당장 꺼져.”

“엄마한테 지금 그게 무슨 말 버릇이야? ‘너’라니, ‘꺼져’라니!”

 한동안 엄마를 노려보던 민호(가명·서울 S중 3)는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 치더니 엄마의 어깨를 힘껏 밀쳤다. 엄마 황미선(가명·47)씨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털썩 주저 앉았다.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 목숨보다 소중하게 키워놨더니 이제 엄마를 사람으로도 안 보는구나”라며 통곡했다. 민호는 눈물을 쏟는 엄마를 방에서 질질 끌어내고 문을 거칠게 닫았다.

 민호가 집에서만 이런 게 아니다. 학교에서는 무단조퇴를 밥 먹듯 한다. 같이 학교에서 빠져 나온 친구들과 어울려 PC방과 당구장을 전전한다. 술·담배는 기본이다. 학교 담임 교사도 손을 놓은 지 오래다. 수업에 들어와 봤자 엎드려 자거나 “북한이 왜 연평도를 포격했고 중국이 왜 북한 편을 드는지 아느냐”는 식의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 수업 분위기를 흐리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단으로 조퇴를 해도 말리는 분위기가 아니다.

#“미친○, X쇼를 하고 있네.”

초등학교 6학년 딸아이 정아(가명)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엄마 최은숙(가명·42)씨는 순간 돌처럼 굳었다. 아무 연락도 없이 오후 9시가 다 돼 집에 들어온 정아를 호되게 나무라던 참이었다. “너, 다시 말해봐. 지금 그거 엄마한테 한 소리야?” 최씨의 떨리는 목소리에 정아는 “어, 그래. 내가 뭘 잘못했냐고. 재수 없는 X이 웃기고 있어, 진짜”라고 쏘아붙이더니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최씨는 자식 입에서 쏟아진 욕설에 넋이 나가 거실에 앉아 밤을 꼬박 샜다.

 정아는 그 뒤부터 기분이 언짢아지기만 하면 엄마에게 거침없이 욕을 해댔다. “웃기고 있네” “짜증나게 또 오버한다”는 식의 비아냥거림은 예삿일이 됐다. 최씨는 “정아 아빠가 다혈질이라 애를 때리기라도 할까 봐 쉬쉬하기만 하고 처음에 제대로 혼내지 못한 게 화근인 것 같다”며 “자식한테 욕을 먹어도 말 한마디 못하는 신세가 됐다”며 참담해했다.

황씨는 “민호가 중1 때까지만 해도 과학고 진학을 추천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고 예의도 바른 아이였다”며 “착하고 똑똑하던 애가 갑자기 왜 저렇게 엇나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황씨 사례를 상담한 사는기쁨신경정신과 김현수 원장은 “부모의 잘못된 양육 태도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황씨 부부의 양육 태도가 지나치게 둔감하다는 지적이었다. 민호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오거나 영재교육원 시험 대상자로 뽑혔을 때도 황씨 부부는 기뻐하는 내색 없이 ‘그래 잘했다’ 정도의 반응에 그쳤다. 이런 게 아이의 좌절감을 불렀을 것이라는 말이다. 황씨는 “아이가 내 그런 반응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며 “너무 극성스러운 엄마가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이를 너무 몰랐던 것 같다”고 놀라워했다.

 이윤조 서울시청소년상담지원센터 팀장은 “청소년 인성 문제는 대부분 가정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아이의 타고난 기질이 스트레스에 취약하다거나, 매스컴을 통해 유해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 탓도 물론 있죠. 하지만 비행청소년들 중에 가정에 문제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살인이나 방화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들을 살펴보면 빈곤이나 부모의 이혼으로 가정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순천향대 정진성 교수가 2007~2009년 발표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부모의 감독 소홀이나 가정 교육의 부재가 청소년 비행을 초래하는 원인이다. 반대로 말하면 온전한 가정 환경이 주는 정신적 안정이 청소년 비행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 팀장은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을 ‘모든 게 부모 탓’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아이의 문제가 전적으로 부모에게서 비롯됐다고 자책하는 건 옳지 않다는 말이다. 그는 “부모는 자녀 문제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지만, 개선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심한 문제아들도 부모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아이에 대한 믿음을 갖고 먼저 관계 회복의 손을 내밀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녀는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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