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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47)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12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맞지 않겠다!
나는 에너지가 끓어오르는 걸 느끼며, 속으로 말했다.
돌이켜보면, 두들겨 맞으면서 느꼈던 황홀감은 순간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와 달리 나의 쇠말굽에 의해 누군가의 두개골이 쪼개져 내려앉을 때 경험했던 쾌감은 ‘시작은 미미했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한 것이었다. 다른 무엇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광안리에서 횟집 주인의 두개골을 깨뜨리고 난 뒤 이곳으로 오면서부터는, 소진됐던 내부의 에너지가 효과 빠른 재활 프로그램에 돌입했다고 느꼈고, 명안진사에서 키 작은 땅딸보 남자를 쓰러뜨리고 난 뒤엔 육체는 물론 기억력까지 가속적으로 회복되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느꼈다. 말굽은 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말굽의 단점은 손금과 손가락을 빨아드리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살인을 통해 육체와 정신이 강고해지는 건 진정으로 황홀하면서도 장대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했다가 내 안에서 풍선처럼 부풀린 다음 우주까지 다시 확장시키는 경험이 그럴 터였다.

나는 점점, 그러면서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내 육체를 유린할 수 없을 것이며, 샌드백처럼 다루게 그냥 내버려두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어둠의 제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밤이 되면 명안진사도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칼날 같은 그믐달빛에 의지해 나는 랜턴도 켜지 않고 가볍게 암벽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열패감은 더 이상 없었다. 근육들이 산맥처럼 일어서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곧 암벽이고 암벽이 곧 나였다. 이사장이 말하는 의식의 일체감이란 이런 것일는지도 몰랐다. 힘이 솟구칠수록 오래되어 지워졌던 기억들 또한 더 세세히 떠올라 이제 기억의 완전한 복원을 앞두고 있었다. 가령 특수부대 장교들이 개를 은행나무에 목매달던 어느 날의 기억은 이렇게 복원됐다. 그들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장교가 몽둥이를 가져온다면서 개를 목매단 끈을 잠깐만 잡고 있으라 했다. ]

고등학교 이학년 때의 일이었다.
아니 고등학교 일학년 때의 일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던 개가 목이 졸려 더 이상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유난히 나를 따랐던 개였다. 튀어나올 듯 충혈된 개의 눈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죽어가던 개의 눈빛은 핏줄 하나하나까지 낱낱이 기억할 수 있었다. 잡고 있던 끈을 일부러 놓은 건지, 아니면 놓친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나는 개목을 옥죄던 끈을 놓았다. 허공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진 개는 공포감에 몰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계급이 높은 장교는 장딴지를 물렸고 다른 장교는 허벅지를 물렸다. 개가 산으로 달아난 다음, 장딴지의 살이 너덜너덜해진 계급이 높은 장교는 금방이라도 나를 개처럼 은행나무에 목매달 기세였다.

북한으로 보낼 특수요원을 전담해 가르치는 장교라 했다. 대령이었던 것도 같고 중령이었던 것도 같았다. 장교의 몽둥이가 가차 없이 나의 어깻죽지에 떨어졌다. 다른 장교에 의해 허리춤을 붙잡힌 아버지는 불구자처럼 기우뚱 서서 내가 맞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맞는 나보다 아버지가 더 공포감에 빠져 있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의 눈을 보고 알았다. 몽둥이 다음엔 주먹이었다. “이새끼, 네가 일부러 줄을 놨지?” 계급이 높은 장교는 씹어뱉었다. 내가 없었더라도 누구에겐가 소진해야 했을 힘이었다. 턱이 돌아가고 눈가가 찢어지고 귀가 틀어졌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목매단 ‘개’였으며, 톱밥이 채워진 ‘자루’에 불과했다.
오래전 목매단 개였던 내가, 지금은 날렵하게 벼랑을 내려가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고, 명안진사는 달빛에 흐물흐물 젖어 있었다. 암벽 모서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 나는 어떤 충동을 느끼고 잠시 동작을 멈췄다. 목매단 개, 혹은 자루에 불과했던 오래전의 내가 선연히 보였다. 잊었던 기억이었다. 무차별로 가격 당하는 나의 모습이, 깊은 내면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내어 단숨에 손가락 끝까지 확장시키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칼날 같은 측릉(側稜)이었다. 나는 한 손만으로 측릉 모서리를 붙잡고 공중부양을 하는 것처럼 허공으로 사지를 뻗고 선 채 발밑의 명안진사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나는 목 매달린 개가 아니다!”라는 말이 그때 내 입에서 나왔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장교는 웃통을 완전히 벗어젖히고 있었다. 나를 향해 청동빛 주먹을 날려 올 때, 계급이 높은 장교의 눈에서 어떤 황홀경이 지나가는 것도 나는 보았다. 분명했다. 개의 눈빛처럼 그 장교의 눈빛도 기억의 회로를 타고 어느덧 완전히 복원돼 있었다. 이사장이 머무는 명안전엔 아직 불이 밝았다. 분명히 명안전이었다. 나는 명안전 불빛을 보고, 개와 장교의 눈도 보았다. “더 이상 나는 자루가 아니다!”라는 말이 한 번 더 밀려나왔다. 계급이 높은 장교의 핏발 선 눈과, 목매달린 개의 눈과, 그리고 이사장의 눈이 두서없이 오버랩되다가 어떤 순간, 새로 단 문짝의 잠금쇠처럼 따그락, 하고 들어가 한 몸뚱어리로 잠겼다. 기억의 복원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입이 저절로 쩍 하고 벌어졌다. “더 이상 나는 자루가 아니다!”라고, 나는 바로 명안전에 잠들어 있을 검투사, 이사장에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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