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아에서 노숙자된 한인 기구한 삶

미주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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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정 에그버츠씨-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에그버츠씨가 담담하게 노숙자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깨진 안경 너머로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고단한 노숙자의 삶이 오버랩 되고 있다.


소아마비 장애지닌 입양인, 양부모와 사이 좋지만
도움 요청할 생각은 없어
부지런떨면 한끼도 안굶지만 살아있음 느끼려 때론 구걸,
3년6개월후면 홈 신청자격

해마다 연말이 되면 으레 매스컴을 타는 이들이 있다. 노숙자들이다. 하지만 연말이나 돼야 집중되는 매스컴의 보도에서도 이들은 주인공이 아니다. 홈리스를 찾아 온정을 베푸는 개인, 단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에서 그들의 존재는 공들여 앵글을 잡은 사진 속의 배경, 잘해야 조연일 뿐이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린 지난 주, 오렌지카운티 최대 규모의 노숙자 집합소인 샌타애나 시청 뒤편을 찾아갔다. 마이클 정 에그버츠. 그는 이곳에 모이는 150여 노숙자들 중 유일한 한인이다. 아시아계 노숙자라곤 불과 다섯 명 남짓한 이 곳에서 한쪽 렌즈가 깨진 안경을 끼고 휠체어를 탄 그는 유난히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무명씨에서 박정원, 마이클 정 에그버츠로

마이클 정 에그버츠는 두 살때 서울의 한 병원 앞에서 발견됐다. 고아원 시절엔 박정원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소아마비로 오른 다리를 잃은 그는 1972년 미시건주 칼라메쥬의 에그버츠 부부에게 입양됐다.

양부모는 한국을 잊지 말라며 미들네임을 ‘정’으로 지었다, 자상한 부모와 의좋은 형제자매와 즐겁게 지냈다. 81년 헌팅턴비치로 이주한 그는 캘스테이트 풀러턴에서 어카운팅을 전공했고 92년 졸업했다. 32세가 되던 99년 독립을 결정하고 부모 품을 떠났다. 에그버츠는 “성인이 되면 본인의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야 되는 것”이라며 “처음에는 두려움도 컸지만 막상 닥치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의 삶, 개척자도 ‘나’

에그버츠는 푸드스탬프, 메디케어 등 대부분의 생활비는 장애인에게 주어지는 정부 혜택, 렌트비는 연방주택국 섹션8 프로그램에 의지했다. 파트타이머로 대형마켓에서 일하고 세일즈맨도 경험했다.

그는 갈 곳 없는 동네 젊은이들을 재워 줬다. 15명에 달하는 이들이 짧게는 1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그의 집에 머물렀다. 하지만 온정이 화근이 됐다.

이웃들은 독립해야 될 자녀들을 망친다며 그를 미워했다. 관리사무소로 불만 접수가 빗발쳤다. 그러던 중 99년 5월 주택 보조 프로그램이 만료됐다. 아파트에선 지체없이 퇴거를 통보했다.

새로운 거처를 찾기가 여의치 않자 그는 노숙을 선택했고 집을 비우는 날 샌타애나행 버스에 스스로 휠체어를 올렸다.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한 적도 없다고 한다. “왜” 라는 물음에 그는 “성인이니까. 내 생활은 내가 책임져야 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한국식 사고방식은 그의 머리 속엔 아예 없는 듯 했다.

◇고달픈 노숙 1년만에 적응

노숙 첫 날의 두려움과 공포는 지금도 뚜렷하다. 먹을 것, 잠자리 등 모든 게 막연했다. 노숙자 특유의 냄새, 행인의 눈초리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노숙자 중엔 경찰의 눈을 피해 온 갱도 있었다. 이들은 노숙자들이 구걸로 모은 돈을 강탈했다. 밤이 되니 공포가 밀려왔다.

이렇게 시작된 노숙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기약없는 기다림과의 싸움이었다. 매일 시, 카운티, 연방 사회보장국을 찾아 주택 보조를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만료 이후 5년을 기다려야 신청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 때로는 직원들에게 “나같은 장애인이 길바닥에서 자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소리치며 따졌다. 그는 지금도 대답 없는 메아리와의 싸움을 그치지 않고 있다.

1년이 지나자 노숙자의 삶이 익숙해졌다. 그를 찾아온 양부모와 만나기도 하고 그도 부모 집을 방문해 근황을 알렸다. “부모가 한 차례 집에 들어와 살라는 제의를 한 적이 있지만 거절했다. 이후엔 부모도 다시 말을 꺼내지 않는다.”

◇ 투표하는 노숙자

에그버츠는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노숙자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매일 오전 5시 찾아오는 경찰의 “이곳을 떠나라”는 경고는 자명종 소리다. 노숙자들은 근처 식당이나 정부 청사를 찾아 몸을 씻는다. 일자리를 찾는 이들은 매일 씻고 옷도 깔끔해 겉으로 봐선 노숙자인 지 알 수 없다.

오전 8시, 정오, 오후 5시에 구호단체 밥차가 온다. 부지런만 떨면 한 끼도 굶지 않는다. 한가한 시간엔 다른 노숙자들과 대화를 하고 정치에 대해 토론도 한다. 에그버츠는 중간선거 때 투표도 했다.

가장 큰 일은 비바람과 추위를 피해 밤을 보낼 곳을 찾는 것. 추울 땐 더 극한적인 상황을 상상한다. “북극 한 복판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나아진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편하다. 더이상 밑바닥으로 내려갈 일도 없지 않은가.”
때로는 구걸도 한다. 살아있다는 느낌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동전, 1달러 지폐를 모아 근처 패스트푸드점을 찾거나 편의점에서 담배를 산다.

구걸이 자존심 상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당신도 상사에게 임금을 올려달라고 할 때, 계약을 위해 다른 회사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느냐. 상대가 다르고 금액이 다를 뿐 구걸은 누구나 하는 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 가장 바라는 것. 홈 스위트 홈.

에그버츠의 소원은 편안히 기거할 집을 갖는 것이다. 3년6개월 후면 신청 자격이 생긴다.

한 단체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한 적이 있었지만 그 단체 사정으로 2개월을 못 채우고 거리로 돌아왔다. 따뜻한 보금자리를 털고 노숙에 재적응하는 과정은 꽤나 고통스러웠다. 최소 1년 이상 머물 수 없다면 차라리 노숙을 계속하는 편이 낫다고 한다.

그도 꿈을 꾼다. 살 곳을 찾으면 직장을 구하고 가정도 꾸리고 싶다. 그는 “세일즈 일을 하게 되면 아마 넘버 원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밑바닥 생활을 오래 하며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빗방울이 굵어지자 에그버츠는 잘 곳을 찾아야 한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혹시 다음에 오면 작은 캘린더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는 알아야 되지 않겠냐”면서.

백정환 기자 baek@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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