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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핵참화, 핵성전” … 김정일 ‘핵게임’ 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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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이 ‘12월 경축 음악회’를 관람한 뒤 공훈국가합창단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이영호 총참모장, 김 위원장.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후계자인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군부의 핵심들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이례적 연회를 열었다. 김 위원장의 최고사령관 추대 19주년을 맞아서다. 그동안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 기념 중앙 보고대회는 열렸지만 연회는 2001년 인민무력부 주최 이래 9년 만이다. 김정일의 연회 참석은 처음이기도 하다. 조선중앙통신은 이영호 군 총참모장이 연설했으며, 연회 참가자들이 김 위원장의 ‘건강’을 위해 건배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른바 ‘꺾어지는 해’(5년 또는 10년 주기)가 아닌데, 김정일 부자가 참가한 가운데 연회가 열린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고 말한다. 북한의 천안함 폭침(3월 26일)과 연평도 공격(11월 23일),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김정은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취임 등 올 한 해 활동을 총결산하는 의미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이날 연회는 재래식 무기를 통한 대남 공격과 핵 능력 과시라는 두 개의 트랙을 한꺼번에 돌린 북한 군부의 자축연이자 내년 초 김정일의 본격적인 핵 게임을 앞두고 마련한 단합 대회 성격이 짙다”고 말했다.

 김정일의 핵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천안함과 연평도 공격에 가려졌을 뿐이다. 6월 25일 노동신문의 논평이 포문을 열었다. 천안함 사건을 ‘남조선의 특대형 모략극’이라 주장하며 “조선반도에는 임의의 시각에 핵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초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있다”고 했다. 핵 전쟁을 위협한 것이다. 7월 24일 국방위원회는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다음날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을 비난하며 “핵 억제력에 기초한 보복 성전(聖戰)을 개시할 것”이라고 했다. 8월 24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핵 억제력에 기초한 보복 성전을 개시할 것”이라고 반복했다.

 연평도 공격 이후엔 더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12월 13일 노동신문은 논평을 통해 우리 군의 서해 해상 사격훈련 계획에 대해 “조선반도에 핵전쟁의 불구름을 몰아오는 밤낮의 망동”이라고 했다. 이어 18일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우리 민족끼리’ 논평에서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면 조선전쟁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핵 참화가 민족의 머리 위에 덮어 씌어지게 된다”고 위협했다. 지난 23일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우리의 국방부 장관)은 “우리의 혁명 무력은 핵 억제력에 대한 우리 식의 성전을 개시할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성전과 핵 억제력을 결합하겠다는 얘기다.

 김정일의 핵 게임은 연평도 공격 보름 전쯤부터 예고됐다. 2004년 1월부터 6차례나 북한을 방문한 핵과학자 시그프리드 헤커 미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 소장을 통해서다. 북한은 그의 방북 기간(11월 9~13일)에 그동안 개발 사실을 부인해 왔던 우라늄 농축시설 현장을 공개했다. 헤커 박사가 “깜짝 놀랐다(stunned)”고 했을 정도로 우라늄 농축시설의 통제실은 완벽했다. 우라늄을 농축하는 원심분리기 2000개가 연결돼 있었다. 육불화우라늄을 넣고 1년을 돌리면 핵무기 1개 분량의 고농축우라늄을 얻을 수 있다는 추산이 나온다. 미국은 이 시설의 기술 수준이 이란보다 앞서고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렸다(뉴욕 타임스). 북한은 헤커 박사와 함께 로버트 칼린 스탠퍼드대 객원 연구원도 함께 초청했다. 칼린은 “2000년 체결한 북·미 코뮈니케가 해결방법”이란 북한 관리의 말을 외부 세계에 전달했다.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만나 체결한 북·미 코뮈니케의 핵심은 ‘북·미 적대관계 종식’이다.

북한은 이어 지난 16~21일 민주당의 대북 파이프인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를 평양으로 불렀다. 리처드슨을 통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단 복귀 허용’과 ‘핵연료봉 국외반출 협상 용의’ 등의 유화적인 안을 내놓았다. 요컨대 군부를 통해선 기존의 핵무기 사용을 위협했고, 헤커 박사에겐 새로운 핵 능력을 과시했으며 리처드슨을 통해선 대미 핵 협상 가능성을 흘린 셈이다. 핵 카드를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신호로 보인다.

 2010년 북한의 핵 게임은 외형상 1994년 초와 흡사하다. 당시 북한은 5MWe 원자로의 핵연료봉 봉인 제거를 둘러싼 IAEA 사찰 문제로 미국과 대립했다.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회담의 박영수 북측 대표는 “서울은 여기서 멀지 않다.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해 한반도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김일성 당시 주석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초청해 북·미 고위급 회담과 남북 정상회담 카드를 통해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울프 블리처 CNN 앵커까지 동행한 가운데 이뤄진 리처드슨의 방북은 당시의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물론 당시는 북한이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을 때다. 그러나 지금은 두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고, 핵무기의 소형화와 핵탑재 미사일 개발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 책임 연구원은 “북한은 남한에 대해 재래식 도발을 하면서 핵 공포까지 조장해 남한 사회에 극도의 위축감을 주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전문가는 “핵에는 핵으로 대응해야 하고 남한 내 철수한 전술핵 무기도 다시 가져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라면서 “한·미 국방 당국의 핵확장억제위원회에서 구체적인 핵우산 대비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수정·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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