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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주부, 문학을 토론하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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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 12편을 모아 책을 펴낸 북클럽 ‘세 번째 달’ 회원들. 15명의 회원들은 서울 통의동 한옥집에 모여 책을 읽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바꿔 나간다. [오종택 기자]


“흔히 보르헤스 작품이 어렵다고 하는데 읽지 않고 지레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첫 주만 지나면 다들 보르헤스에 빠지고 말죠.”(한혜선·국제대 교수)

 “처음에는 정말 추상화 같은 작품이구나 생각했죠. 금세 와닿지 않았지만 함께 읽으며 생각이 달라졌어요. 이 작품을 통해서 제가 겪는 일상을 다르게 보고 겪어낼 힘이 생겼어요. “(최세경·주부)

오밀조밀 한옥이 모여 있는 서울 통의동 골목의 아담한 집 방안에서 새 나오는 얘기다. 사설 문학 강좌라도 열리는 것일까. 주부들의 북클럽 ‘세 번째 달’ 모임이다. 한 회원 소유의 ‘희래당(熙來堂)’이라는 이 한옥집에는 매주 수·금요일마다 예닐곱 명의 여성이 모여든다. 주로 40, 50대로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8년째 모임을 지속해오고 있는 ‘세 번째 달’은 작은 방에 둘러앉아 수많은 작품을 탐독해왔다.

 이들이 최근 책 한 권을 함께 펴냈다. 제목은 『여자』다. 회원 신은희(시인)씨는 “우리들끼리만 읽기에는 너무 아까운 작품이다. 작품을 깊이 파헤쳐보면 지금 우리 주변의 삶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옥집에서 문학 읽기 세 번째 달은 2003년 주수자(소설가)·신은희(시인)·김현실(국문학 박사·주부)씨 등 세 명의 모임으로 출발했다. ‘세 번째 달’은 ‘두 번째 달(눈에 보이는 하늘의 달)’을 넘어 ‘첫 번째 달(사물의 본질)’을 찾아가는 ‘마음의 달’이라는 뜻이다. 23년간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한 주씨가 제안해 1주에 한 번씩 그의 집에서 만났다. 하나·둘 지인이 모여들면서 현재 회원은 15명. 한꺼번에 다 모이기 힘들어 수·금요일 두 팀으로 나눴다. 회원의 대부분은 주부지만 방송통신위원회 부이사관(윤혜주), 출판사 대표(박옥희·인디북), 교수(한혜선), 번역가(한미희) 등 직업인들도 있다.

 책은 해외 고전에서부터 국내 근대·현대소설과 시를 두루 읽었다. 특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의 작품집(민음사, 총 5권)은 ‘필수과목’처럼 지난 2년 동안 꾸준히 읽어 왔다.

문학이 삶을 바꾸다 작품을 곱씹으며 느끼는 감동은 자연스럽게 삶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게 회원들의 이야기다. 문학을 통해 삶을 재창조한다는 것이다. 안은주(주부)씨는 “대학생 딸한테서 엄마가 전보다 훨씬 너그러워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최세경씨는 삶이 확 바뀌었다고 말한다. 3년 전에 찍은 사진을 얼마 전 들춰보다 깜짝 놀랐다. “옷 입는 것부터 표정까지 지금의 저와 너무 달라 보이더군요(웃음).” 책 속의 다양한 여자 주인공들을 살피며 ‘여성성’이 가진 힘을 확인한 것일까. 최씨는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러워지고 한편으론 더 강해진 것 같다고 했다. 회원 김난이(주부)씨는 “책을 읽으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주수자씨는 “문학은 삶의 다양한 관점을 포용하게 한다”며 “이것이 진정한 문학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신은희씨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피상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건 결국 삶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책 읽는 모임은 자칫 관념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자기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문학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세 번째 달’은 벌써부터 『여자 2』작업을 구상하고 있다. 신은희씨는 “내년부터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으며 회원들이 직접 번역할 생각도 있다”고 귀띔했다. 생활 속에 파고든 예술의 현장이다.

글=이은주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세 번째 달’ 회원들이 말하는 『여자』

책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뷔용의 아내’에서부터 로베르트 무질의 ‘포르투갈 여자’, 기 드 모파상의 ‘의자 고치는 여자’, 루쉰의 ‘풍파’,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눈(目)’, 기쿠치 간의 ‘어떤 사랑이야기’ 등 총 12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세 번째 달’ 회원들이 함께 읽으며 토론해온 것이다.

 김현실(국문학 박사·주부)씨는 셔우드 앤더슨의 ‘어머니’를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으로 꼽았다. 흔히 알려진 희생적인 모성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강한 어머니를 만나게 해준 작품이라는 점에서다. ‘어머니’는 아들이 남편처럼 세속적인 야망만을 좇아 허황된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해경(외식업)씨는 ‘세 번째 달’ 모임에서 10대 시절에 읽은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자’를 4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사랑하는 대상이 없으면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주인공 올렌카를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의 질곡을 거친 나이에 다시 읽어보니 누군가를 사랑할 때 온전히 상대방이 되어버리는 주인공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했다.

 신은희(시인)씨는 탄광지대를 배경으로 광부 남편의 죽음을 다룬 ‘국화 냄새’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국화 냄새’는 평생 술을 마시고, 돈을 탕진하던 남편이 주검으로 돌아오자 시어머니와 함께 장례를 치르는 여자 얘기를 그린 작품이다. 남편의 주검을 보며 ‘낯섦’을 경험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역설을 표현했다. 우리가 서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책 속에서

■“죽은 남자를 보면서 차갑고 초연한 그녀의 마음은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지? 내가 지금껏 뭘 해온 걸까? 난 존재하지도 않는 남편과 싸우고 있었어. (중략) 난 대체 지금까지 누구와 살아온 거야.” (D H 로런스 ‘국화 냄새’)

■“순결은 무지일 따름이야. 정신적으로 가장 수치스러운 상태이지. (중략) 여자에게 순결하다는 낙인을 찍는 것은 순결하지 않다는 낙인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일이야.” (버지니아 울프, ‘어떤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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