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 저널리즘 - 나는 세 살배기 횡성 한우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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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의 눈빛이 애처롭다. 구제역을 이기고 살처분을 면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듯한 눈이다. 사진은 22일 구제역 양성판정을 받은 강원도 횡성 인근 화천군 축산농가의 한우. [화천=연합뉴스]

저 지금 벌벌 떨고 있습니다. 추워서가 아닙니다. 세밑 온정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그것도 약물 주사 맞고 땅속에 묻히는 그런 끔찍한 죽음 말입니다. 지금까지 돼지를 포함해 27만8000여 마리가 죽었네요. 전 죄가 없습니다. 있다면 평생 인간들을 위해 일하고 곱게 죽어서 맛있는 고기를 제공해야 하는 운명(?), 그겁니다. 하나 더 있군요. 구제역에 걸리면 바로 옆 친구들에게 전염시키고 곧 죽어야 하는 허약한 면역체계, 그겁니다.

 전 이름이 없습니다. 주인이 가끔 ‘어이 어이’ 하며 저를 쓰다듬어 그냥 ‘어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사는 곳은 횡성군 횡성읍 조곡리 OK목장이죠. 육질로는 국내 ‘한우의 지존’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나이는 2년5개월입니다. 몸무게는 800㎏입니다. 몸값은 700만원 정도입니다. 저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거세당했습니다. 아팠지만 명품 한우가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세된 수소가 맛있다는 게 한우업계에서는 정설이지요.

 오늘(23일)은 너무 슬픈 날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목장에서 불과 10㎞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 살던 친구가 구제역에 걸려 저세상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같이 살던 44마리의 친구는 오늘 새벽 모두 땅에 묻혔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언제 이 같은 불행이 닥칠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이날 제가 살고 있는 마을의 다른 농장을 비롯, 횡성 지역에서만 다섯 곳의 한우가 구제역 증상을 보인다는 신고를 했네요. 죽음의 그림자가 코밑까지 온 걸까요. 주인아저씨는 할 말을 잊은 채 한숨을 푹푹 쉬며 망연자실한 표정입니다.

 지난달 28일 경북 안동에서 처음 구제역이 발생한 이후 저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20만 마리가 넘는 친구가 비명횡사했거든요.

 그날(지난달 28일) 이후 주인아저씨 등 농장 식구 이외에는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농장 입구 300m 앞을 차단해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주인도 바깥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전 하루 한두 번 샤워를 하고 있습니다. 방역 소독입니다. 주인아저씨는 고압 분무기로 내 몸에 소독약을 뿌립니다. 독하지 않고 나쁜 냄새가 난 것도 아니지만 소독약이 몸에 닿을 때마다 독침이 치르는 듯 전율이 느껴집니다. 엊그제는 날이 따뜻해 그나마 견딜 만했지만 오늘 오후에는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져 얼음 샤워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구제역이란 놈이 원망스럽습니다. 원수가 따로 없지요. 저는 정부가 왜 손을 쓰지 못하는지 답답합니다. 20여 일 사이 안동에서 경기도로, 이어 명품 한우의 고장 횡성을 비롯해 강원도 곳곳으로 마구 돌아다닐 동안 방역 당국은 뭘 했느냐고요. 물론 사람들이 구제역이 만연한 나라를 여행하고 또 아무 생각 없이 농촌 마을을 돌아다닌 잘못은 있지만요. 이들이 어디를 어떻게 헤집고 다녔는지 경로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잖아요. 이것만 알아도 이렇게 많은 친구를 잃지 않아도 되고, 저 또한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지내지 않아도 되니까요.

 이렇게 주절주절 얘기하는 저는 사실 새해 1월이면 농장을 떠날 몸이었습니다. 키워 준 주인 아저씨에게 경제적으로 보답하고 소비자의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지요. 저는 쇠고기 최고등급인 1등급을 받을 수 있도록 좋은 사료 많이 먹고 대우를 잘 받으며 자랐습니다. 특히 저를 비롯한 횡성 한우는 육즙이 풍부하고 감칠맛이 나며 씹는 맛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국가 명품 브랜드로 인증받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난해 우리 고장 한우 26마리가 1000만원이 넘는 값에 팔릴 정도로 ‘한우의 지존’으로 회자됐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희 선배들은 11월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오찬 메뉴에도 등장했었습니다.

  그러나 구제역 때문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전용 도축장이 23일 폐쇄됐기 때문입니다. 횡성이 아닌 어디로도 이동할 수 없습니다. 밤낮 구제역을 막는 일에 골몰했던 주인아저씨는 걱정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저와 같이 사는 친구 40마리가 축협 등을 통해 판매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어찌됐든 구제역 이놈, 빨리 잡혔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잡도록 인간들이 노력 좀 해 줘요. 그래야 15년 동안 쌓아 온 명품 횡성 한우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제 후배들도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고요. 그렇게 되면 주인의 눈물도, 비명에 가는 친구들의 눈물도 사라지겠죠.

횡성=이찬호 기자

횡성한우는

▶1995년부터 명품화 사업 추진

-전국 최초 거세 지원

-보증씨소 정액 공급

-한우프라자 건립해 유통판로 개척

-축산물 1호 지리적표시제 등록

▶사육현황

-호수:1758가구

-두수:2만1698마리(브랜드 등록우는 5200마리)

-브랜드육 생산량:300t/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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