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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는 아직도 내 사랑' 환하게 부른 이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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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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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방송사들은 개편 시즌인 봄·가을마다 폐지되거나 새롭게 등장하는 프로그램으로 인해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난다. 특히 오랜 기간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장수 프로그램이라면 사회자는 눈물바다로 마지막 방송을 갈무리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일개 프로그램의 고별방송도 진행자나 보고 듣는 대중의 마음을 싸하게 만드는데,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거대 방송사가 갑자기 문을 닫고 고별방송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30년 전, 한국대중문화사의 일대 참변으로 기록된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이십 세, TBC 고별 방송에서 운 죄로 출연 묶여 #은폐 罪? 나이 3살 올리려 가슴에 양말 넣고 공연 #하지만, 30년 폐방 행사에서 그 노래 다시 열창

국내 방송사상 최초로 기록된 고별방송은 5공화국 신군부의 언론 강제 통폐합 조치로 시작됐다. 1980년 11월30일 자정을 앞두고 당시 채널 7번 동양방송(TBC) TV와 라디오, 그리고 동아방송(DBS), 지방방송사인 전일 방송과 서해방송이 문을 닫으며 끝내 시청자·청취자들과 이별했다. 그중 대중적 영향력이 가장 막강했던 TBC TV의 고별방송은 오랫동안 대중적 이슈로 회자했다. 고별방송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엔딩 무대를 장식한 가수 이은하가 자신의 빅 히트곡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부르다 끝내 오열하는 장면을 연출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더욱 아리게 했다. TBC 라디오도 황인용 아나운서가 “이제 5분 남았습니다. 10분만이라도 더 있었으면…”이라며 울먹이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최근 TBC 동양방송 폐방 3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가수 이은하는 고별방송 당시에 불렀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또다시 열창해 관심을 끌었다. 이씨는 “30년의 긴 세월을 뚫고 멋진 TBC로 영원할 것이라 믿는다”며 이번에는 눈물이 아닌 환한 표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그때 그 시절을 살아왔다면 가슴속 깊숙하게 파고들었던 당대의 슈퍼스타 이은하의 애절한 노래에서 자유로웠던 대중은 없을 것이다. 장르를 넘나든 넓고 다채로운 음악 스펙트럼과 무대를 압도하던 카리스마,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맛깔스럽던 허스키 보컬, 그리고 가슴 먹먹하게 했던 애절한 울림은 모두 그만이 구현했던 차별적 어법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이은하는 ‘1970, 80년대의 옥주현’으로 곧잘 비유된다. 옥주현은 1990년대를 풍미한 슈퍼 걸그룹 ‘핑클’ 출신이다.

2010년 12월 3일 오후 서울 충청로의 한 음식점에서 막해외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이은하 씨를 만났다. 오랜 공백 끝에 재기한 이후의 근황도 궁금했고, 무엇보다 서슬퍼런 신군부 시절 강제로 문을 닫은 동양방송의 고별방송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으니 그동안 말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이제는 속 시원하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약속시간에 정확하게 맞춰 나타난, 근사한 머플러를 두르고 화사한 웃음을 짓는 그의 첫인상은 내 머리속에 선머슴애로 아롱진 이미지와 달리 꽤나 근사한 여성적 분위기였다. 자연스럽게 TBC 고별방송 이야기를 화제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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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하가 발표한 앨범들 재킷.

TBC 고별방송의 추억
1970년대의 대중가요계는 지금처럼 한순간에 슈퍼스타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힘든 시절이었다. 노래 발표 후 히트까지는 적어도 반 년 정도는 기본이었다. 지금은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TV 쇼 프로그램 방송세트의 교체도 당시엔 한나절이나 걸렸다. 더구나 남진·나훈아·이수미·정훈희 같은 스타 가수들에게 우선적으로 시간이 배정되었기에 신인가수들은 한가할 때나 겨우 녹화를 할 수 있었다. 30년이 흘러 그때 그 노래를 다시 부른 이은하 씨는 “고별방송을 했던 그곳에서 다시 노래를 부르니 감회가 깊었습니다. 약간 울컥했지만 울면 안 되는 분위기인 것 같아 참았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진실은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 문패를 달라는데 안 줄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라고 운을 뗐다.

동양방송 별관건물에서 진행된 고별방송에서 이은하는 당대 최고의 여가수인 혜은이·박경애와 함께 무대에 섰다. “그때 세 명이 함께 서 있다가 한 명씩 차례로 무대 앞으로 나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두 언니는 밝은 분위기로 노래를 마친 후 제 순서가 와 무대 앞으로 나갔는데 강부자·이순재·장미희 씨 등 TBC 출신 연기자들이 모두 펑펑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감수성이 예민한 10대였던지라 선배 연기자들이 우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마음이 울컥해졌어요. 그래서 제 노래 첫 소절인 ‘아직도…’를 부르자마자 저도 모르게 목이 꽉 차올라왔어요. 그날 노래를 거의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펑펑 쏟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마도 밝은 표정으로 노래를 잘 불렀던 다른 가수들과 달리 정신 없이 울며 노래했던 제가 당연히 비교가 된 것 같아요.”

다음날 아침, KBS 통폐합 축하 쇼에 출연하러 간 이은하는 예상치 못한 난감한 분위기에 부닥쳤다. 담당 피디가 “야 이은하, 너 가! 너 어제 울었잖아”라며 출연 취소를 통보했던 것. 또한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도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리겠니?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 돼?”라며 마구 윽박질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어리고 순박했던 10대 소녀가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뒤늦게 전해들은 그날의 비공식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렇다. “당시 저는 너무 어려 정치나 사회, 그리고 로비나 비즈니스 같은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고별방송에서 많은 분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울컥하는 마음에 울면서 노래한 것이 그렇게 심각한 일인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아마 제 출연정지를 정권에서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후에 전해들은 말인데요. 11월 30일 고별방송 날 당시 TBC 홍두표 사장님이 KBS 사장님과 함께 마지막 방송을 보면서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 아이들 잘 부탁한다. TBC 식구는 아니지만 KBS 사장님이 오늘의 해프닝을 잘 선처해 달라’고 말씀하셨대요. 그런데 다음날 오히려 ‘어제 운 애들 다 아웃시키라’ 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출연정지 소식에 황당했어요. 당시 저는 TBC와 MBC는 물론이고 KBS에서도 그해에 가수왕을 수상한, 소위 잘나가는 가수였거든요. 그래서 ‘누가 나를, 말도 안 돼.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제 철 없는 생각이었고, 그런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연령 정정 소송으로 화제된 슬픈 사연
이은하는 2007년 신보를 발표하며 컴백한 후 령 정정 소송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서울가정법원에 실제보다 많은 연령을 정정해달라는 소송을 냈던 것. “그저 내 실제 나이를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 동창생들도 지인들도 모두 실제 내 나이를 알고 있었지만 정작 저는 엉뚱한 나이로 인해 심적 고충에 시달리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왜 그는 대부분 나이를 적게 속이는 연예계의 관행과 달리 오히려 나이를 높여야 했을까?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이후 모든 노래가사들이 철저한 심의를 거친 후에나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또한 발표하려는 모든 앨범에는 건전가요를 하나씩 수록해야 하는 의무가 부가됐고, 긴급 조치 9호가 발동된 후에는 신중현 등 중요 가수들이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끌려가는 불상사까지 빚어졌던,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최악의 암흑기였다.

1973년 <임마중>(김주명 작사, 김준규 작곡)으로 데뷔한 13세 소녀 이은하는 가수활동을 하기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 당시 17세 미만의 청소년은 밤무대에 출연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 가수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1957년생인 큰집 언니의 호적등본을 제출해 활동을 시작했지만 늘 적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년을 버티다 1974년 법원에 호적 나이를 세 살 높여 1958년생으로 정정했다.

물론 미성년자였던 이은하의 의사와 무관한 일이었지만 그는 그때부터 2007년까지 33년간 1961년생이 아닌 1958년생으로 살아야 했다. “호적상으로는 실제 나이보다 세 살 속였지만 발육이 덜 된 저는 성숙한 여자로 보이기 위해 가슴에 스타킹을 넣어 부풀리고, 나이 들어 보이려고 생머리를 고데머리로 바꿔 다녔어요. 예명 이은하는 엄마가 ‘스타가 되려면 별 하나 가지고 안 된다. 은하수는 되어야 한다’고 지어줬는데 지금은 본명 이효순도 이은하로 완전 개명했습니다.”

데뷔 시절의 추억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성장한 그는 천성적으로 밝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새나라쇼단’의 아코디언 연주자로 활동했던 음악인이었고, 고모부는 만담가로 유명했던 김용운 씨다. 취학 전 그는 아버지의 지방공연에 따라다니며 무대 옆 의자에 앉아 가수들을 따라하는 재능을 보여 베이비싱어로 무대에 올라 4세 때인 1964년에 이미 연예협회 연기분과 회원증을 획득했다. 아버지는 딸의 음악적 재능이 마냥 좋았지만 어머니는 “무슨 유랑극단도 아니고 배고픈 딴따라는 절대로 하지 말라”며 딸의 가수활동을 반대했다고 한다. 홍릉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음악활동을 그만두고 동네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열었다. 생활이 무료해진 아버지의 유일한 즐거움은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타를 치며 노래연습을 시키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소일거리로 제게 노래연습을 시켰지만 엄하셨어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이미자 선생님의 <동백아가씨> 노래 연습을 시킬 때면 트로트의 꺾기 창법을 못하면 여지없이 혼을 내셨어요. 그러다 동네 어른들이 애를 못살게 굴지 말고 학원에 보내라 해서 1972년 청계천5가에 있던 오아시스레코드 전속 작곡가인 김학송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조교로 있던 작곡가 김준규 선생님에게 본격적으로 노래를 사사했습니다.”

당시 작곡가 김준규는 허스키한 이은하의 목소리와 톤을 들어보고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하지만 이미자 같은 트로트 스타일이 아닌 김추자 스타일이 맞는다고 데뷔앨범 제작을 권유했다. 이은하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데뷔앨범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억척스러웠던 부친이 제작비를 마련해 자비 출반을 했기 때문. “그때 아버지가 쌀 30가마를 외가에서 가져다 제작비 30만원을 들여 4곡을 녹음했어요. 작사·작곡·편곡·녹음비가 각각 5000원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딸의 데뷔 음반을 만든 아버지는 왕십리에 살던 코미디언 서영춘·이기동에게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반응이 무척 좋아 방송국에 심의를 넣었다. 즉각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의 풋풋한 노래는 그해 TBC 방송가요대상 신인여가수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제법 입소문을 탔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탓에 스스로 가수로서의 욕심이나 음악적 정체성 같은 것은 없었다. “가수를 꿈꿨냐고요? 아니, 어린애가 무슨 꿈이 있었겠어요? 솔직히 공부를 안 해도 되고, 남들에게 공주처럼 대접받으니까 좋았죠. 그런데 1974년 리틀엔젤스예술학교(현 선화예술학교)에서 처음으로 신입생을 뽑을 때 떨어진 것에 한이 맺혔어요. 사실 당연히 합격할 줄 알고 중학교 추첨도 넣지 않았거든요. 그때 작곡가 원희명 선생님의 반주로 가곡 <보리밭>을 불러 오디션에는 붙었는데 인터뷰 때 가수활동을 해야하기에 수업을 좀 빠져야 한다고 했더니 떨어졌어요. 그래서 중학교에는 적만 두고 집에서 수학과 영어 과외를 하면서 가수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외모 콤플렉스
그는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 힘든 애절한 허스키 음색과 탁월한 가창력으로 곧 ‘제2의 정훈희’ 또는 ‘제2의 김추자’가 될 재목으로 인정받았지만 방송에 적합한 외모가 아니라는 황당한 이유로 얼굴을 알리기가 쉽지 않았다. 데뷔 때부터 외모에 대한 심각한 콤플렉스가 따라다녔던 것. 그는 첫 방송 출연부터 좌절을 겪었다. 당시 MBC에서 처음으로 녹화를 했지만 방송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당시 전우중 선생님이 제가 출연하고 있던 명동 ‘오비스케빈’에 와 제 노래를 듣고는 MBC 오비 그랜드 쇼의 토요일 밤 순서에 나오라고 했어요. 처음으로 방송에 나가 계단을 내려오며 폴 앵카의 <파파>를 부르는데 신인인지라 너무 긴장해 뒤뚱거리며 내려와 무지 혼났습니다. 결국 TV에 나올 가수가 아니라고 방송에서 저를 빼버리더군요. 당시 저는 덩치가 크다고 ‘돼지’ ‘저팔계’로 불리며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몰라요.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분하던지 그때부터 노래로 승부를 본다는 오기를 품고 집 근처 홍릉산에서 발성연습을 하면서 3년 동안 정말 죽도록 연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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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하는 성형에 대해 “나쁜 감정은 없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돼지코’라고 놀림을 받아온 코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그도 10여 년 전 코 성형수술을 했다. “저는부작용 때문에 3~4년 전에 제거하긴 했지만 외모 콤플렉스를 없애주고 예뻐진다면 성형에 대해서는 찬성입니다. 다이어트도 전성기 때인 1984년 17㎏까지 빼봤어요.” 이후 1975년 발표한 <최진사댁 셋째 딸>로 가창력을 인정받긴 했지만 이은하가 최정상권 가수로 각광받는 데는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1975년쯤 아버지의 추천으로 첫 히트곡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부르게 되었다. 사실 원희명이 작곡한 이 노래는 그 이전에도 남진·진송남·문주란 등 기성가수들이 이미 다 불렀던, 소위 ‘시중에 돌아다니던 노래’였다. 1976년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발표했을 때 그는 여중 3학년에 불과했다.

“당시 저는 세련되지 못했어요. 노래가 반응을 얻으면서 처음으로 TBC <쇼쇼쇼>에 나갔는데 신인들은 얼굴을 알리기 위해 거의 풀 샷으로 촬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노래는 잘하는데 얼굴이 안 된다’고 해 아이라인을 다 떨어뜨릴 정도로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다섯살 차이인 혜은이 언니는 모든 피디들이 ‘여성스럽고 예쁘다’며 좋아했는데, 저에게는 ‘야 이 자식’ 하며 사내 대하듯이 했거든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다이어트를 하면 여자다워 보이지 않을까, 연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참 고민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전성기의 추억
1976년 이은하는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태정 작사, 원희명 작곡)으로 TBC <가요톱10> 5회 연속 정상에 올랐다. 또한 MBC <금주의 인기가요>에서도 5회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최정상의 인기가수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1977년에 발표한 <밤차>(유승엽 작사·작곡) 또한 연속적으로 TBC와 MBC의 가요순위에서 5회 연속 1위에 오르며 처음으로 MBC 10대가수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에 발표한 불후의 겨울시즌 명곡으로 평가받는 <겨울장미> 역시 양대 방송에서 5주 연속 1위 퍼레이드를 이어가며 TBC 여자가수왕과 MBC 10대가수에 등극시킨 공전의 히트곡이다. 당시 내한해 TV에 함께 출연했던 세계적인 팝 여가수 보니 타일러도 이은하의 <겨울장미>를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1979년에는 처음으로 자신이 작사한 <아리송해>(이승대 작곡)로 KBS 가수왕까지 휩쓸었다. 이 노래는 어수선했던 당대의 시대상을 대변하는 노래 제목으로 오해를 받았다. 그래서 가사를 쓴 자신은 조사를 받지 않았지만 작곡가인 이승대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에 발표한 노래는 모두 심의번호가 있잖아요? 사실 그 <아리송해>는 1979년의 혼란했던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쓴 가사가 아니라 그 이전에 <밤차>처럼 유행어를 만들어볼까 하고 재미있게 만들어본 단순한 가사였어요.”

1980년에 들어서도 이은하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역시나 MBC 드라마 주제가였던 <봄비>(이희우 작사, 김희갑 작곡)가 <금주의 인기가요> 5회 연속 1위를 차지하며 4년 연속 10대가수상의 영예를 안겼다. 1981년에는 KBS 세계가요제 본선에서 로 우수가창상을 수상했고 <중앙일보>에서 선정한 우리들의 스타상 인기부문을 수상했다. 이은하는 이후 1985년까지 <한순간><네가 좋아><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 등으로 히트 퍼레이드를 벌이며 10대가수상 단골 수상자라는 금자탑을 세워나갔다. 분기점은 1986년에 발표한, 자신이 작사하고 요절가수 장덕이 작곡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 많은 후배가수에 의해 수없이 리메이크된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대표곡이지만 처음으로 인기정상에서 멀어지게 한 사연 많은 곡이다.

영화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의 추억
1982년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은하는 영화배우로 변신을 시도했다. 당시는 인기가수들의 히트곡을 동명의 영화 제목으로 하고, 가수를 주연배우로 출연시킨 영화가 일종의 트렌드를 형성했다. 군사정권의 통제와 검열로 인해 영화의 자유로운 소재 선택이 힘들었던 시절이었기에 가수의 인기를 등에 업은 영화계의 고육지책이었다. 최정상급 가수였던 이은하도 강대선 감독의 영화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에서 주제가를 부르고 주연배우로 직접 출연까지 했다. 흥행대박이 터지진 않았지만 인기가수 이은하가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 3만 명에 근접하는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요즘 가수들이 영화나 드라마,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질책하지 마세요. 재능이 넘쳐서 그러는 거예요. 저도 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한 적이 있어요. 아버지가 인순이 씨도 <흑녀>라는 영화에 출연해 벗는 연기까지 했다고 저를 설득해 출연은 했는데 솔직히 전문배우가 아닌 가수인지라 벗는 연기에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목욕탕에서 브래지어·팬티 차림으로 출연하는 목욕관리사 연기는 직접 했는데 그 이상의 노출이 필요한 베드신은 대역을 세웠습니다. 하하하….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작은 역이라도 연기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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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기, 그리고 변신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힙합과 랩·댄스음악으로 대변되는 신세대 뮤지션이 점령한 가요계는 빠르게 변화했고 ‘서태지와 아이들’과 같은 새로운 스타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상대적으로 방송 노출 빈도가 낮아진 이은하는 대중의 기억에서 잠시 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음반제작자로 변신해 후배가수 발굴에 전념했던 이은하는 1997년 ‘리컬렉션 음반’을 내기까지 가수로서 특별한 활동은 없었다.한국 대중음악은 중·장년층을 위한 ‘트로트’와 젊은층을 위한 ‘가요’로 양분된다. 어느덧 중견가수가 된 이은하도 트로트를 부르라는 제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왜 10년 이상 된 중견가수는 모두 트로트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IMF 외환위기 이후 2002년, 고심 끝에 ‘일본 진출’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현지에서 싱글 음반을 발표하고 국내 <수사반장>과 비슷한 컨셉트의 일본 TV 연속드라마 <하쿠라 형사>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했지만 성공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이후 예전처럼 TV에 자주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매년 디너 콘서트를 통해 팬들과 만나왔고, <불량주부><인어아가씨><바람꽃> 등 드라마나 영화 <은장도> OST에 참여 하는 ‘정중동’의 활동을 해왔다. 2005년에는 서강대·단국대·성균관대·한국체대 등 4개 대학 ‘최고경영자 대학원과정’을 동시에 밟으며 못다 한 향학열을 불태웠다.

또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홍보단 부회장직을 맡은 이은하는 현재 가요계 최고의 여성 아마골퍼로 통한다. 성공은 쉽지 않았지만 한평생 노래와 인연을 놓지 않았던 그는 음반기획사 ‘밀키웍스’를 설립했다. 1992년 <탈출> 앨범 이후 15년 만에 발표한 2007년 신보 <컴백>은 그 결과물이다.

여전히 갈증을 느끼는 음악
다채로운 음악 장르를 섭렵한 이은하에게 음악은 여전히 시도하고 공부하고 싶은 것이 많은 갈증의 대상이다. 비록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의 컴백 앨범은 평범한 가요가 아닌 장르 음악인 ‘트랜스’와 ‘하우스’로 음악 스타일에 일대 변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그는 외국가수 중에 용기와 자신감, 그리고 엔터테이너적인 열정이 넘치는 무대로 지금껏 사랑받는 섹시 댄스가수 마돈나를 특히 좋아한다. “컴백을 앞두고 어떤 장르로 갈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던 중 유럽여행에서 트렌스 음악을 접했는데 10년전부터 마돈나가 그 음악을 하고 있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장르인데 유럽에서는 중년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란 것을 알고 ‘아, 이거다’ 생각했죠.” 불쑥 그는 “이제까지 제가 원했던 음악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의외의 고백을 한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록을 듣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는 정반대였어요. 저는 아버지로 인해 트로트로 음악을 시작해 지금에야 록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전성기 때도 제 주변에 있던 음악인들 은 모두 흑인음악을 하던 사람들인지라 늘 흑인음악을 숙제로 주니까 오기로 한 것이지, 스스로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어요.”

1975년 자신의 백밴드였던 소울 록밴드 ‘데블스’의 김명길이 새미 스미스의 의 해적판 한 장을 불쑥 보여주며 ‘너 이런 거 못하지?’ 했다. 승부욕이 남달랐던 그는 약이 올라 한 달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해 들으며 파고들어 그 여가수의 호흡까지 따내며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그는 20살이 넘어 후지 록 페스티벌에서 본 조니가 부르는 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윽박질러 시키는 숙제 같은 노래들보다 시원하게 샤우팅을 하는 록이 이유 없이 좋아져 “지금도 록음악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털어놓는다.

자신의 노래가사를 따라가는 삶
사실 그의 노래에는 일관된 정서가 있다. 슬픈 이별과 기다림의 정서다. 그래서 앞으로는 뭔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밝고 건강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한다. 사실 데뷔곡 <임마중>은 오지 않는 옛사랑을 애타게 기다리는 노래였고 <겨울장미><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등 그의 모든 히트곡은 하나같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대표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도 결혼에 골인할 뻔했던 남자친구와 이별의 슬픈 감정을 절절하게 담아낸 자작시였다. 비록 인기 정상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계기가 된 곡이지만 오랫동안 강력한 대중적 흡입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한 치의 거짓 없는 그의 절절한 진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수는 자신의 노래에 따라 인생이 정해진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저는 평생 혼자 살 팔자인가 봅니다. 정말 한번도 행복한 노래를 불러보지 못했어요. 헤어지고 떠나간 사랑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사가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축가 요청이 있을 때면 항상 제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그래서인가, 이은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1992년에 슬픈 정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탈출>이라는 타이틀로 앨범을 발표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침체기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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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디스코 디바 이은하
빠른 템포의 펑키한 곡 <밤차>와 <아리송해>는 <제3한강교><새벽비>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던 혜은이와 쌍벽을 이루며 디스코시대를 주도했던 그의 대표곡들이다. 손을 권총 모양으로 만들어 머리 위로 ‘동서남북’을 찌르며 육감적으로 춤추던 모습은 왜 이은하가 1970년대의 디스코 디바로 불리는지에 대한 증명일 것이다. 코디가 없던 예전에 그는 외국 비디오를 보고 안무를 연구하고, 주먹구구였지만 스스로 무대의상을 노래 분위기에 맞춰 밤을 지새우며 준비했다. 요즘 가수들의 의상에 대해 묻자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협찬에 너무 의존하다보니 엔터테이너라는 프라이드가 없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과거엔 가수가 대중의 패션 유행까지 이끌었는데 요즘 후배 연예인들은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수입의 대부분이 들더라도 가수는 의상만큼은 최고로 맞춰 입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에 개봉한 최호 감독의 영화 <고고70>은 1970년대 디스코 디바 이은하의 추억을 되살려준 복고영화다.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1970년대 밤문화의 중심에서 뜨겁게 노래한 이 영화의 롤 모델인 소울 록 밴드 데블스는 실제로 이은하의 백밴드였다. 데블스는 해골 무대복은 물론이고 잠옷이나 망토 복장을 하는가 하면 맨발로 무대를 누비며 기타를 뒤로 둘러메고 연주하는 독특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무대 매너로 인기 높았던 전설적인 밴드다. 이은하의 성공 요인으로 데블스의 소울과 펑크 질감이 가득한 감각적인 편곡과 연주를 빼놓을 수 없다. 극중에서 1970년대 섹시 디바 ‘미미’ 역을 열연한 신민아는 아찔하고 과감한 무대의상과 한껏 부풀린 헤어스타일로 격렬한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신민아가 재현한 롤 모델은 바로 이은하다. “사실 20대들은 저를 잘 모를 겁니다. 저를 기억해주는 후배들이 고마워요. 조성모, JK김동욱 등 제 노래를 기억하고 리메이크한 후배들이 있기에 요즘 젊은 친구들이 제 이름은 몰라도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라는 노래는 알잖아요?”

화려한 싱글 이은하의 사랑 이야기
어느덧 50줄에 들어선 이은하는 아직 화려한 싱글이다. “하나님은 재능과 사랑 두 가지를 동시에 주지는 않는 것 같아요. 결혼해서 남편과 아이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도 행복하겠지만, 인연은 내가 잡는다고 잡히는 것도 아니고, 막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노래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잖아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도 싱글이라서 가능한 것 같아요.” 그에게도 서로 좋아해 결혼할 뻔했던 남자친구가 딱 한명 있었다. 1985년 한 기타리스트가 그의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을 받아내려다 재떨이로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린사건이 있었다.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이고 그분도 결혼해서 잘살고 있는데…. 사실 그때는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용기도 없었고, 피 흘리는 남자친구가 죽을 것 같아 제가 포기하겠다고 했어요. 그 후로는 결혼하자는 남자가 한 명도 나타나지 않더군요.”

실제로 당대 대중에게 각인된 이은하의 이미지는 거의 선머슴에 가까웠다. 말투나 외모 자체가 예쁜 여자의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내숭떨기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는 것을 컨셉트로 삼았기 때문. “요즘은 신인가수와 탤런트를 키우면서 노래하느라 한가한 시간이 별로 없어요. 어디든 항상 다섯 명 이상 함께 다녀서 외롭지도 않아요. 그런데 여자는 내숭을 좀 떨어야 인기를 끄는 것 같아요. 저도 40살 때까지만 해도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포기했습니다. 이제는 그냥 마음 편하게 교감하는 남자친구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없네요. 하하….”

기획사 건립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다 2010년 그는 고 김현식의 20주기 공식 헌정앨범 <비처럼 음악처럼>을 제작하는 의미있는 작업을 했다. 거액의 제작비를 들여 김현식의 아들 김완제를 참여시킨 2장의 CD와 1장의 다큐멘터리 DVD를 전격 발표했던 것. 그리고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추모 콘서트까지 성대하게 개최해 김현식의 음악적 재평가에 일조했다. “김현식 앨범은 좋은 취지였어요. 그분과는 돌아가시기 3개월 전인 1990년 여름에 방배동에서 만난 인연이 있어요. 그때 신곡을 받으러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우연하게 만나 인사를 했더니 ‘솔직히 난 자네같이 승승장구하고 인기가 있으면 그렇게 음악 안 해’라고 송곳처럼 가슴 찌르는 말을 하더군요. 성인이면 내 음악 장르를 고집했을 터인데 부모님과 갈등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내 모습이 그분에게도 보였나 봐요. 정곡을 찔려서인지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하면서 막 싸웠지요. 그후 힘들 때마다 못내 그분의 한마디가 생각나더군요. 그래서 내가 죽어도 나를 생각해줄 사람은 하나쯤 있지 않을까 싶어 추모앨범 작업을 결심했어요. 생각만큼 반응은 없었지만 새해에도 김장훈과 함께 김현식 트리뷰트 공연은 계속할 마음입니다.”

그는 2011년에 야심찬 사업을 시작한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아내의 유혹>을 외주제작으로 성공한 스타맥스와 합작해 드라마 외주제작 토털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인 ‘플라이엔터테인먼트’의 회장으로 취임할 예정이다. 상투적이지만 마지막 질문으로 현재 가장 행복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역시나 그에게는 노래가 존재의 이유였다.

“무대에 서서 관객과 호응하며 노래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죠. 건강하게 노래하면서 무대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처럼 멋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이은하 씨는 TBC에 대한 의리와 무한애정을 다시 표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사랑앓이·가슴앓이를 참 많이도 했는데 그중 저를 성장시켜준 TBC가 다시 부활해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그때도 최고의 방송이었지만, 다시 거듭나 방송문화를 선도했던 모든 노하우로 타 방송의 부족한 면들을 보완해서 멋진 방송으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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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가수

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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