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망국 앞에서도 지켜낸 무상 의학교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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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대한의원 의육부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 이들은 전원 무상교육을 받던 의학교 시절과 달리 절반 이상이 자기 돈을 들여 교육을 받아야 했다. [사진= 『대한의원 개원 기념 사진첩』, 1908]

한국에서 최초로 정식 근대 의학교육을 이수한 이들은 1899년 개교한 의학교의 졸업생들이다. 의학교 졸업생들은 자주적인 근대 의학교육의 첫 수료자라는 점에서 한국 근대의학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이들은 의학교 교관으로서 후학 양성에, 의사로서 진료활동에, 군의관·방역원·위생원 등으로서 공무에 참여했으며, 1900년대 애국계몽잡지들에 의학 및 위생에 관한 글을 기고해 민중의 계몽과 사회 개량에도 힘썼다.

 그런데 ‘의학교관제’(1899.3.24)에 따르면 의학교는 학생들이 의학 교육을 받는 데 필요한 모든 경비를 국고로 충당한 국립 무상교육 기관이었다. 국운이 다해 가던 중에도 대한제국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장학금을 주어 가며 학생들을 교육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학교가 일제에 의해 1907년 대한의원 의육부를 거쳐 1910년 조선총독부 의원 부속 교육기관으로 전환되면서 무상교육체제는 점차 유상교육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1911년에 발표된 조선총독부령 제19, 20호(『조선총독부 관보』, 1911.2.20)에는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생도에게 지급하는 학자금은 식비·피복(被服)비와 잡비의 세 종류이며, 그 금액은 1인당 의과 생도는 월 7원 이내, 조산부과와 간호부과 생도는 월 5원 이내로 하고(‘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생도 학자급여규칙’), 이를 수여받는 학생은 의과생 정원의 3분의 1, 조산부과와 간호부과 정원의 반수(半數)를 넘지 않도록 규정돼 있었다(‘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규칙’). 학생들의 절반 이상은 자비(自費)로 의학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총독부가 이같이 학자금 수여자를 한정한 것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을 좀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한 것이었다(기창덕, ‘국가에 의한 서양의학교육’, 『의사학』, 1993.6.) 명문가의 자제였던 김교준(金敎準)이 의학교 제1회 최연소 졸업생이자 최초의 모교 출신 교관이었다는 사실이 말해 주듯 무상으로 해도 부유한 계층의 자녀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교육혜택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유상교육으로 전환한 것은, 학자금이라는 진입장벽을 만들어 가난한 인재들의 교육 기회를 더욱 축소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교육을 통해 조선 내 계급 분열을 심화시키기 위한 저 일본제국의 책략이었다.

 이처럼 대한제국이 국가를 지켜낼 인재 배출에 대한 희망으로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지원했던 반면 조선을 식민화하려는 총독부는 여기에 빈부 간 격차 문제를 연관시켰다는 사실은 오늘날 진통을 겪고 있는 국가의 교육정책 방향 설정에도 시사하는 바가 없지는 않을 듯하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