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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특종]러시아 군사전문기자 미하일 루덴코의 북핵 개발 비화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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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마지막 비밀 ―. 맥아더 원수의 만주지역에 대한 핵무기 공격 계획에 대해 소련과 북한은 어떻게 대응했나. 옛소련군 영웅 3명을 인터뷰하고 관련자료를 13년여 동안 추적해온 러시아 최고의 핵 및 군사전문기자 미하일 루덴코의 미공개 원고에는 美 CIA도 알지 못한 긴박한 움직임이 관련자들의 증언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52년 8월 소련 원자력무기개발위원회 위원장이자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의 비밀스런 평양行을 엄호하기 위해 당시 소련 공군의 최신예 미그-15 전투기 40대가 출동한 비화, 북한이 이때부터 원자폭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을 만날 수 있다. 루덴코로부터 입수한 ‘한국전쟁 그 마지막 비밀’ 미공개 원고를 '월간중앙'이 발굴, 전격 공개한다. [편집자]

80년대 중반 나는 모스크바에 위치한 우주 항공 기념 박물관의 부관장인 소비에트 영웅 드미트리 수포닌(Dmitry Suponin)
과 알게 되었다. 마침 그때 나는 비행기의 스텔스 기술에 필요한 도장기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고, 드미트리 수포닌은 군 항공 계통에 있는 자신의 오랜 지기들을 이용하여 나의 발명을 진척시키는 데 할 수 있는 한의 도움을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와 나는 친밀해져 그는 나에게 전쟁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할 정도로 교분이 두터워지게 되었다.

그는 세계대전 후 원거리 항공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얘기도 해주었는데, 그 항공대는 소련에서 1947년에 신형 폭격기 Tu-4(원자폭탄 탑재기)
가 개발된 이후 새로운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전쟁 초기에 원자 무기를 대서양 건너편의 목표물들에 투하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드미트리 수포닌으로부터 나는 한국전쟁 당시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한 사건에 그가 참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 사건은 다름아니라 소비에트의 원수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y Beriya)
가 52년 8월 초 평양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대로 한번 적어 보기로 하겠다.

"미그-15 40대 호위 속 베리야 전쟁중인 평양으로"

52년 7월 초 어느날 드미트리 수포닌은 소련 공군 총참모부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그는 세미팔라틴스크 시험장에서 원자폭탄을 실질적으로 운용해 본 경험이 있었던 소련 공군의 유일한 비밀 비행대의 항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총참모부에 출두하자마자 비행대의 대원수 알렉산드르 노비코프(Aleksandr Novikov)
가 수포닌을 맞았다.

원수는 이야기 시작과 함께 앞으로 수포닌이 알게 될 모든 것에 대해 철저히 비밀을 유지할 것을 경고하고는 폭격기 Tu-4의 승무원으로 임명되었다고 통보했다. 이 폭격기는 며칠 동안 친선국가 중의 한 곳을 비밀스런 외교적 사명을 띠고 비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수포닌에게 8월5일 아침 모스크바 근교의 주코프스키시에 있는 소련 공군 비행실험연구소에 출두해 그곳에서 후속 명령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수포닌은 약속된 시간에 그 장소에 도착해 더위에도 불구하고 가죽잠바를 입고 서성거리던 이반 표도로프(Ivan Fedorov)
를 만났다. 그는 소련 공군 내에서 유명한 시험 비행사였다. 표도로프는 수포닌을 알아보고는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중요한 승객 한 사람과 평양으로 비행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 사람은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라는 것이었다.

“뭐라고, 당신 지금 제정신이오?”수포닌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 나왔다.

“거기 한국은 지금 전쟁중인데! 게다가 특히 하늘에서는 얼마나 치열한데! 어떻게 스탈린 동지의 전우가 목숨을 걸 수 있다는 말이오. 그리고 만약, 당치도 않지만 우리가 격추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요?”이반 표도로프는 대답으로 단지 양팔을 벌릴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꿀 틈도 없었다. 작전은 이미 진행중이었다. 수포닌은 지체없이 연구소 특별국에서 수령한 비행지도에 따라 비행 노선을 만들기 시작했고, 표도로프는 저녁녘에 차와 승무원들 위를 날아다니며 공항 상공을 몇바퀴 선회했다.

어둑어둑해졌을 때에서야 수포닌은 비로소 비행기 측면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 가 보고 항법기기를 점검해 볼 수 있었다. 승객용 객실 아래 장비를 새로 설비한 동체의 측면에는 베리야의 개인 경호원이 있었다. 그는 수포닌이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제지했다.

다음날 아침 공항에서는 믿기 힘든 거대한 서커스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신형 제트전투기인 미그­15기들이 공항에 착륙하기 시작했다. 이반 표도로프가 한마디 했다.

“라브렌티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전투기 2개 편대가 호위한다고! 상상이 가? 40대야! 전투기 40대! 도대체 뭐가 겁나는 거야? 기껏 자기 나라 영토 위를 나는 거 아냐? 쟤들 전투기한테 뭐 일이 안생길 줄 알어? 농담하지 말라고 그래. 대열을 지어 1만km를 난다고! 아마도 누군가 한놈은 떨어질거다!”

베리야 자신은 다음날, 즉 7일 새벽 출발 1시간 전에 나타났다. 그는 의전에 따른 기장의 보고도 받지 않고 말없이 비행기 트랩을 올랐다. 수행 장군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수포닌은 한 음울하게 생긴 사람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의 상의 주머니는 의심스럽게 불룩 튀어나와 있었고 항법실에서 수포닌의 등 뒤에 붙박이로 서 있었다. 그는 비행 내내 눈을 치떠 수포닌을 쳐다보며 15분마다 음울한 목소리로 단 한가지의 질문을 했다.
“지금 우리가 어디 있는 거요?”

비행중에 그들은 몇번인가 재급유와 휴식을 위해 착륙했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소비에트 전 영토의 하늘에는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다. 이날은 모든 비행이 금지되었다. 노선의 마지막 구간인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평양까지를 그들은 저공비행으로 무선 교신을 완전히 끊은 채 8월8일 새벽에 주파하는 데 성공했다.

평양에 착륙했을 때 이들의 지휘관 이반 표도로프가 베리야의 심기를 건드렸다.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이반 표도로프는 영접객들 중에서 조국전쟁 당시 자신의 부하였고 세 차례나 소비에트 영웅 칭호를 받은 이반 코제두프를 찾아내고는 그의 타고난 단순함으로 옛 부하와 인사하기 위해 비집고 다가간 것이다. 나중에 수포닌이 이반 표도로프에게 듣고 알게 된 바로는 한국전쟁 당시 코제두프는 북한에서 소련 전투비행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당연히 한국인 성을 쓰면서…. 때문에 공항에서 베리야를 영접할 때 그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은 용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 여기서 드미트리 수포닌의 이야기는 끝난다. 게다가 그에게는 평양 체제시의 특별한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모스크바로 돌아갈 때까지 그는 다른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이반 표도로프만 예외로 하고)
평양 근처의 엄중한 호위 속에 있는 별장에서 머물렀다. 수포닌은 정원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연못에서 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머리 위, 한국 하늘에서 벌어지는 공중전을 관찰하며 지냈다.

“만약 네가 표도로프와 직접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엄청날 텐데.”
헤어지면서 수포닌이 말했다.

“이반은 이 비행에 대해 훨씬 많이 알거든!”

하지만 이반 표도로프와 내가 만나게 되는 그 행운의 순간까지는 13년이 흘러야 했다. 나는 그에게서 아홉개의 전쟁에 참가해 총 1백34기의 적기를 격추시킨 그의 운명에 대해 많은 흥미로운 일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평양으로 향했던 비행의 중요한 세부적인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반 표도로프 “원자폭탄 탑재기 Tu-4로 평양行”

대략 48년 봄부터인가 설계자 세묜 라보치킨의 설계부 조종사장(長)
이었던 표도로프는 '특수기술'을 습득하라는 명령과 함께 원거리 항공대로 전속됐다. 그 '특수기술'은 당시 신형 폭격기 Tu-4, 원자폭탄 탑재기였다. 물론 표도로프의 임무가 갖는 의미는 새로운 비행기에 익숙해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특수탄약'의 투척 기술을 숙련하는 데 있었다.

51년 11월에는 세미팔라틴스크 근교의 시험장에서 Tu-4기로부터 첫번째 원자폭탄 투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표도로프는 탑재기를 수행하는 임무를 띤 관측기에 탑승했다. 그러나 나쁜 날씨 때문에 비행기는 측면에 폭탄을 그대로 탑재한 채 세미팔라틴스크의 민간공항에 착륙해야만 했다.

표도로프는 이 실패 직후 다시 한번 해보자고 제안했다. 비록 그날 비행을 재개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런 저돌성을 어떻게 해서인지 베리야가 알게 되었고 표도로프를 자신의 '개인' 비행기 조종사로 임명했다. 그 개인 비행기는 다름아닌 Tu-4였다. 이렇게 해서 평양으로 비행해야 했을 때 베리야는 직접 표도로프에게 승무원들을 이끌라고 지시한 것이다.

평양에 도착한 52년 당시는 전황이 가장 치열할 때였다. 당시까지 제트기로 엄청난 비행시간을 보유하고 있었던 표도로프는 한국에서 미국의 '슈퍼세이버' 때문에 많은 손실을 보고 있었던 소련 조종사들에게 '경험을 전수'해 주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표도로프는 그곳에서 이반 코제두프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자유로운 사냥을 위해 비행”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싫어 완강히 버텼다. 결국 이 일은 베리야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그는 “개인 책임하”에 한번의 비행을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실제로 표도로프는 그들이 평양에 머무르는 3일 동안 이런 비행을 몇번이나 해야 했다. 결과는 한국전쟁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는 신참내기였던 표도로프에게는 상당한 것이었다. 그는 공중전에서 세명의 미군 조종사를 떨어뜨리고 자신의 비행 경력에서 승리의 횟수를 1백34까지 올렸다. 소련 조종사들의 원기를 놀랄 만큼 북돋우고, 그들의 전투의식을 단단히 고취시켰음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 “왜 베리야는 평양에 갔을까?”라는 질문에 관해서는 나의 첫번째 면담자인 드미트리 수포닌과 마지막으로 몇번 만났을 때 그가 대답해 주었다.

수포닌이 전한 파벨 타란 장군의 증언 “'우라노프 프로젝트'에 북한도 참가했다”

평양에서 돌아온 뒤 수포닌과 그의 동료들은 국가기밀을 누설하지 않겠다고 서명했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이번 방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한 사건이 53년 여름 베리야가 총살된 직후 있었다. 대략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가 총살된 지 1주일쯤 지나 수포닌은 두 차례에 걸쳐 소비에트 영웅 칭호를 받은 그의 전우인 중장 파벨 타란을 방문했다. 늘 하듯이 전통적인 '전선' 스타일로 보드카 1백g씩을 마시고는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알고 있었어? 왜 그때 베리야와 함께 한국에 갔는지.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52년 7월 한국전이 가장 치열했던 그때 유엔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미국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가 북한을 원자폭탄으로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어. 북한은 그때 원자무기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원자폭탄의 어떤 요소가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원자폭탄에 대항하는 어떠한 방어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지. 이런 위기의 순간에 김일성 원수는 스탈린에게 사회주의의 기반으로 건설된 조선의 형제 인민을 미제 침략자들의 분쇄 위협에서 구해 달라고 호소했어.”

수포닌은 파벨 타란의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서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타란은 한잔 마신 데다 베리야와 그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애달픈 추억으로 격해져 이야기를 계속했다.

“알겠지만 그때 스탈린은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대항할 수가 없었어. 우리는 군비로 원자폭탄을 단 몇개라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시험장에서 검사해 봐야 되는 실험용 몇개 뿐이었지. 그뿐 아니라 탑재기도 없었어. 소련에서 미국까지 비행할 수 있는 B.M. 미야시체프와 A.N. 투폴레프가 설계한 새로운 비행기들은 직전에 개발되었고….

하지만 그것과 함께 뭔가를 해야만 했지! 스탈린은 당시 유일하게 옳은 최상의 결정을 내렸지. 소비에트의 우라노프 프로젝트의 책임자이고 원자폭탄 문제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상황을 분석하고 필수불가결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베리야를 평양에 보냄으로써 '친구 김'에게 최대한의 도덕적 지지를 보여 주기로 결정한 거야.”

“그래서 뭐가 결정됐죠?”
얼큰해진 수포닌이 용기를 내 물어 보았다.

“바로 이거야. 베리야가 평양을 방문하고 나서 2주쯤 지나 완벽한 비밀 속에 많은 수의 북한군 장교들이 원자폭탄 폭격에 방어하는 방법들을 배우러 소비에트로 보내졌지. 윌슨식 방공호, 게이거의 방사선량 측정기, 군대 방어 콤플렉스, 야전 방사선물질 제거소 등 당시 붉은 군대가 적용했던 방법들을 배웠어.

동시에 우라노프 프로젝트 시스템에서 움직이던 몇몇 연구소에 한국인 의사·생물학자·화학자들이 원자폭탄 폭발시 인체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배우기 위해 보내졌지. 바로 이 순간부터 북한의 '원자무기 문제'에 관한 관심은 지속적인 것이 되었지. 전술비행대에 근무하면서 54년 가을 토츠크 시험장에서 원자무기 시험을 준비했던 사람들이 내게 말해 주었는데 이 행사에 북한의 사절단도 포함된 '사회주의 진영' 모든 나라의 군사 사절단이 초대되었다더군. 놀라운 것은 북한 사절단의 수가 가장 많았다는 것이야.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이 모든 기록된 만남들 직후 나는 나와 대화를 나눴던 이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드미트리 수포닌은 군병원에서 신장 결핍으로 사망했고, 이반 표도로프는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일은 이루어 놓았다. 나의 문서에는 여러 징후로 판단컨대 '모든 것을 꿰뚫는' 미 중앙정보국(CIA)
조차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던 한 사건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가 가득 차 있다. 이 출판물을 통해 그 사건에 대해 알게 되는 이 '사무소'의 노병들에게는 더욱 더 흥미있을 것이다.

미하일 루덴코
월간중앙(http://win.joongang.co.kr) 제 287호 199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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