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토크 22] 캐시미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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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미어의 계절이 왔다. 가볍고 따뜻한 재질로 이만한 게 드물다. 그래서 유명 의류회사마다 캐시미어 제품을 내놓는다. 저마다 자사 제품이 최고라고 하면서. 하지만 소비자들은 헷갈린다. 웬 100% 캐미미어 의류가 그리 많은지…. 캐시미어는 한 해 전 세계 생산량이 1만2000t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많다 보니 품질이 들쭉날쭉이다. 너무 짧거나 잘 가공되지 않은 털로 만든 제품은 보풀이 쉽게 일어난다. 가볍고 따뜻하지만 보풀이 잘 생긴다는 단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패브릭의 명장들은 캐시미어를 놓고 온갖 품질 경쟁을 벌이고 있다. 독특한 소재를 섞고, 뛰어난 기술로 더 고급 원단을 만들어 내고 있다. 로로 피아나는 1924년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된 패브릭과 패션 브랜드다. 이 회사는 갻베이비 캐시미어갽라는 제품을 개발해 특허를 냈다. 몽골의 양치기들이 어린 양의 털을 처음 빗질할 때 나오는 1온스(28g) 안팎의 부드러운 솜털을 가리킨다. 이 털은 일반 캐시미어보다 훨씬 가볍고 부드럽다고 한다.

역시 이탈리아 회사인 100년 역사의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캐시미어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여름 옷처럼 가벼운 230g의 소모사(긴 섬유를 꼬아 만든 실) 캐시미어 섬유를 내놓았다. 이 제품은 깃털로 만든 옷처럼 가볍다고 한다.

요즘은 캐미시어를 뛰어넘는 다른 동물의 털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야크털이 그 중 하나다. 야크는 몽골 초원지대의 들소라고 불린다. 어깨 높이가 2m를 넘고, 무게는 2톤 안팎이다. 생존을 위해 털이 많다. 해발 수천m인 티베트와 네팔 산꼭대기의 혹한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 브랜드 알프레드 던힐은 얼마 전 야크 울과 메리노 울이 절반씩 섞인 혼방 소재의 컬렉션을 선보였다.야크 털은 바깥 쪽의 거친 털이 아니라 솜털 같이 부드러운 속털을 사용한다. 야크 속털은 추위를 막아주기 위해 겨울철에만 자란다. 깎아주지 않으면 여름이 되면 모두 빠진다. 야크 털로 만든 섬유는 매우 따뜻하고 고급스러워 최상의 제품으로 분류된다.

붉은사슴 털도 캐시미어 이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전문가들은 부드러우면서도 낙타털과 비슷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털을 세련된 방적기술로 뽑아내면 최상품이 나온다. 고급 신사복 메이커 카날리는 친칠라나 어민(북방족제비)에 캐시미어를 섞은 혼방 섬유로 옷을 만들고 있다.

캐시미어 혼방용으로 각광받는 또 다른 소재는 비큐나(라마의 일종)다. 적은 비율을 섞어도 캐시미어의 촉감이 눈에 띄게 달라진다고 한다. 로로 피아나가 비큐나를 혼방 소재로 쓴다.

동물의 털을 많이 사용하면 동물보호론자로부터 공격을 받곤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반대인 경우도 있다. 로로 피아나가 비큐나를 소재로 쓴다고 했지만 그에 앞서 이 회사는 이 동물을 보호하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지난 20여년 동안 비큐나를 멸종 위기에서 구해낸 일등 공신이다. 뿔 없는 가젤과 비슷한 비큐나는 해발 4000m 고지의 안데스 산맥에서 서식한다. 이것의 털은 가볍고 따뜻하고, 어떤 털보다도 부드럽다. 그래서 동물 털 중에서 가장 비싸다. 캐시미어 가격의 4~6배라고 한다. 잉카 시대엔 많이 살았지만 근년 들어 개체 수가 크게 감소하면서 18만 마리로 불어났다고 한다.

고급 섬유 메이커들의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멀어지는 동물이 아직 하나 남아 있다. 티베트 영양이다. 이 고산지대 동물의 털로 옷감을 만들면 꿈의 제품이 나올 거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람 머리카락보다 4~5배나 가는 직경 10미크론 가량의 털로 만들어지는 옷은 말 그대로 천상의 옷이 아닐까. 문제는 티베트 영양이 멸종위기에 처한 탓에 이 털의 거래가 금지돼 있다는 점이다.로로 피아나가 비큐나를 보호해 개체수를 늘린 다음 그 털을 이용한 것이 정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티베트 영양의 서식지가 티베트와 인도 양쪽에 걸쳐 있어 이것도 쉽지 않다. 비큐나 식으로 협상하려면 두 나라 정부와 조율이 필요한 상황이다.

동물의 털을 이용한 직물은 이처럼 난관이 많다.그래서 로로 피아나는 식물에서도 신천지를 찾고 있다. 그동안 섬유업계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버마산 연꽃 섬유다. 로로 피아나는 이를 '식물성 비큐나'라고 표현한다. 직물섬유로는 최고의 보석이 될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다. 천상의 옷을 향한 인간의 집념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심상복 기자(포브스코리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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