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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마당놀이 30년, 잘 놀았습니다 … 윤문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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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배우 윤문식(67)은 구수하다. 주로 맡는 배역이라곤 고약한 사채업자나 촐랑거리는 방자다. “이미지가 그런 게 아니라 실제가 그려.” 매번 비슷한 느낌은 본인도 싫지 않을까. 한번 멋지게 입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가 손사래를 쳤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뭐 달라져. 주름만 더 쭈글쭈글하게 나와.”

그래도 썩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스튜디오에 온 그의 의상은 번쩍이는 회색 정장에 분홍빛 넥타이였다. “어쩜! 새 신랑 같으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그의 대답. “나도 얼릉 새 장가 가야 하는디, 그 싸∼가지 없는 자식놈이 먼저 간다고 설쳐.”

올해로 30년째다. 1981년 ‘허생전’을 시작으로 그가 마당놀이와 인연을 맺어온 지도. 그 세월의 두께만큼 관객도 그를 살가워했다. 질펀한 농담에 배꼽을 잡았고, 번뜩이는 풍자에 고소해했다. 그런 그가 30주년을 맞아 “이제 떠날 때가 됐다”며 마당놀이와의 이별을 통보했다. 어쩌면 이날 ‘꽃미남 컨셉트’의 촬영은, 그의 마당놀이 30년을 기리며 ‘회춘’을 바라는 팬들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번지르르하게 꾸민다고 인간 윤문식이 달라지랴. 카메라 셔터가 돌아가자 하회탈처럼 푸근한 그의 표정이 그대로 앵글에 잡혔다. 그건 또한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글=최민우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놈 말 한번 속 시원히 한다는 추임새 들을 때 가장 신났지
마음이야 나도 죽을 때까지 마당에서 놀고 싶지만
언제까지 우리 노인네들이 붙잡고 있을 수도 없고 …
지금은 곳간 열쇠 며느리한테 물려줄 때 심정이랄까
공동체 의식 싹트던 그 마당의 정신만은 후배들이 지켜주길 ”

윤문식씨 인터뷰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달 27일 오전에 했다. 마침 극단 미추 마당놀이 30주년작인 ‘마당놀이전’이 개막하는 날이었다. 신경이 예민할 수도 있건만 특유의 입담은 한 편의 만담 같았다. 윤씨는 마당놀이 시작 때부터 함께 출연한 김성녀·김종엽씨와 함께 ‘마당놀이 3인방’으로 불린다. “매번 같이 다니시다가 이렇게 혼자 인터뷰하려니 좀 심심하시겠어요”라고 했더니 “내가 원래 ‘원 톱’ 체질이라 이게 맞아”라며 또 너스레를 떨었다.

-30주년이라 감회가 새로울 텐데 갑자기 ‘마당놀이 은퇴’를 알렸다.

“원래 10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다. 못 해서 여기까지 온 거다. 마음이야 나도 마당에서 죽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젠 후배들이 할 때가 됐다. 언제까지 우리 노인네들이 붙잡고 있어야 하나. 지금 마음은 곳간 열쇠를 며느리한테 물려줄 때의 심정이랄까. 대신 열쇠 한번 주면 난 간섭 안 할 게다. 그건 며느리 마음대로 해야지, 내가 또 미주알고주알하다간 배가 산으로 간다. 후배들 역시 지금껏 10년 이상 해왔다. 충분히 자격이 있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마당놀이가 가지는 정신만은 지켜주었으면 한다.”

-마당놀이 정신이란 건 무엇인가.

“마당이 어떤 곳인가. 애 낳으면 탯줄 태웠던 곳이 마당이었다. 어려서 뛰어놀고, 커서 뽕나무 밑에서 자빠뜨려 결혼식을 하던 곳이었고, 죽어서 상여 나가는 곳이 또 마당이었다. 한국인의 마당엔 우리네 삶의 모든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담겨 있었다. 그뿐인가. 마당엔 동료애가 있었다. 슬프면 동네 사람이 다 같이 모여 슬퍼하던 공간이 마당이었다. 거기서 공동체 의식이 싹텄다. 지나가는 낯선 이가 하루 묵고 가겠다고 마당을 찾으면 주인은 찬밥을 먹을지언정 그 사람에겐 따뜻한 밥을 대접했다. 근데 지금은 어떤가. 옆집 802호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건 마당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마당놀이와 인연을 맺게 됐는가.

“난 인간적인 약점이 많다. 참을성도 없고, 마음을 숨길 줄도 모른다. 노래는 박치에다 음치다. 대신 사람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잔치하면 좋아라 펄쩍펄쩍 뛰다 동네 사람들 쑥 빠지면 너무 허전해 며칠씩 울곤 했다. 이런 성격과 기질을 갖고 있는데, 마당에서 한판 널부러지게 노는 공연을 한다고 하니 어찌 빠질 수 있겠는가.

지금도 생생하다. 1981년 서울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첫 마당놀이 ‘허생전’을 할 때 관객이 수백m까지 줄을 섰다. 체육관 기둥에 매달려 보는 관객도 있었다. 김대중 선생도 줄을 섰다. 그때 난 주인공 ‘허생’이 아니었다. 산적 두목이었다. 그래도 공연이 끝나고 나면 나만 보인다고 하더라. 그때도 엄청 애드리브를 쳤다. ‘도둑은 절대 정직해야 해!’ 관객이 자지러졌다.”

-주인공을 오랫동안 못 한 게 서운하지 않았나. 지금도 조연을 많이 하는데.

“마당놀이니깐 주인공이라고 한 자리 껴주는 거지 어딜 감히…. 나도 거울 있다. 이렇게 겸손하게 생겨서, 자연친화적으로 생겨서 욕심내면 안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내가 로미오를 한다고 상상해 봐라. 당장 전원주가 줄리엣 한다고 나서지 않겠나. 이런 적은 있다. ‘이춘풍전’을 할 때였다. 김성녀씨가 장난끼 많다. 마지막 공연날이었는데 바지를 내리면서 속옷까지 다 벗기는 거다. 그러곤 줄행랑을 쳤다. 그때 내 모습을 보고 연출자가 깜짝 놀라 이듬해 ‘변강쇠전’을 만들더라. 하하.”

윤씨는 성(性)적인 농담을 많이 했다. “내가 했던 말을 모아 두었다 ‘성희롱죄’로 걸면 아마 단군 때부터 지금까지 감방에 있어도 모자랄걸.”

나름의 철학은 분명했다. “성적 비유만큼 사람들 귀에 쏙 박히는 게 없거든. 겉으론 폼 잡아도 속으론 관심 많고 이해하기 쉽다는 거지. 대신 여자를 불쾌하게 만드는 놈들은 성적 농담 근처에도 가면 안 돼.” 이런 와중에도 또 성적인 비유를 했다. “연극하면서 관객 전혀 무시하고 ‘자뻑’에 취한 놈들이 가장 한심해. 왜 여자도 성감대를 건드려야 자빠뜨릴 수 있잖아. 관객도 가려운 데를 긁을 줄 알아야지, 가르치려고 들면 어떡해.”

-마당놀이가 롱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창하게 말하면 해학성·놀이성·즉흥성 등이다. 더 중요한 건 ‘속풀이’라고 할까. ‘고놈 말 한번 속 시원히 한다’고 관객이 추임새 넣을 때 난 가장 신났다. 근본적 요소는 관객을 받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60~70년대 한국엔 텔레비전도 잘 보급되지 않았다. 근데 당시 연극은 ‘기계문명의 병폐’ 같은 걸 많이 다뤘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하는 놈도 모르고 보는 관객도 모르는 연극이 난무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연극은 재미다. 재미만 추구해 자장면에 화학조미료를 넣어선 안 되지만, 기본은 재미다. 거기에 메시지를 버무리는 거다. 마당놀이가 그랬다. 폼 잡지 않고, 관객과 눈높이를 맞추고, 같이 호흡해서 여기까지 온 거다.”

▶‘마당놀이전’=2011년 1월 2일까지. 서울 월드컵경기장 전용극장. 전석 4만5000원. 화·수·목 오후 7시30분, 금·토 오후 3시·7시30분, 일 오후 2시. 02-747-5161.

윤문식은

1943년 1월생

서산 농림고-중앙대 연극영화과 졸

81년 국립극단 입단

86년 극단 미추 창단동인

96년 서울연극제 연기상

주요작= 악극 ‘단장의 미아리고개’,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투캅스’, 드라마 ‘토지’

시시콜콜 파란만장 윤문식

배우 꿈꾸던 고교시절 어머니 말씀 “니가 배우를 해? 동네 개들이 웃겠다”

배우 윤문식은 충남 서산 출신이다. 그가 살던 마을에 TV는 없었고, 달랑 라디오 한 대뿐이었다. 가끔씩 순회공연 오는 여성 국극이 최고 볼거리였다.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가 봤어. 그걸 나와서 못 본 아줌니들에게 그대로 흉내 냈지. 다들 내가 하는 게 더 재미있다고들 했어.”

소년 시절부터 끼가 다분했나 보다. “배우가 안 됐으면 아마 무당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 어려서도 남사당패가 오면 내가 더 신나서 뛰어 다녔응께.”

서산 농림고를 다녔다. 가을철 수확기가 되면 학교에 축제가 열렸다. 그는 소희극(小喜劇)을 했다. 그냥 원래 있던 희곡을 갖다 쓴 게 아니었다. 학생들이 힘들게 재배한 고구마를 교사들이 몰래 빼돌린다는 식으로 절묘하게 풍자했다.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를 본 교장 선생님이 그를 따로 불렀다.

“넌 배우 자질이 충분하니, 서울로 올라가 연극영화과에 진학해라.” 그 얘기를 접한 어머니의 반응. “이눔아, 배우는 아랑 드롱, 그레고리 펙, 신성일 같은 사람이 하는 겨. 니가 배우를 해? 동네 개들이 웃겠다.”

연기자가 되고 싶어 서울행을 택했다.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구두를 닦아 돈을 모아 연기학원을 다녔고,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원서를 냈다. 경쟁률 17대1. 시험을 보러 학교에 가니 줄이 길었다.

“진짜로 기막히게 생긴 연놈들만 왔더라고. ‘안 되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는데, 맨 끝에 딱 나처럼 생긴 두 명이 눈에 들어오는 거야. 그게 박인환과 최주봉이야.”

1969년 극단 가교의 ‘미련한 팔자대감’이 데뷔작이다. 전국 70여 군데를 돌아다니며 공연했다. 이후 조역만 맡던 그가 데뷔 16년 만에 처음 주인공을 맡게 됐다. 바로 ‘플란다스의 개’에서 개를 연기한 것.

“한여름에 밍크털을 뒤집어 쓰고 2시간을 진짜 개처럼 기어 다녔어. 갓 결혼한 마누라가 보러 와선 창피했는지 ‘당장 그만두고 복덕방이나 해’라며 얼마나 쏘아대던지.”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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