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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 인간문화재, 양승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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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공연이 하나 열렸다. ‘악성(樂聖) 김창조의 산조 탄생 120주년 기념’ 공연이었다. 안내책자 표지에는 세 명의 얼굴 사진이 나란히 실렸다. 그중 조선시대 복식인 정자관(程子冠)을 쓴 남성이 120년 전인 1890년에 산조(散調·기악독주곡)라는 국악 장르를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김창조(1856~1919년) 선생이었다. 그의 손녀이며 무형문화재 23호(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였던 죽파(竹坡) 김난초(1911~89년) 여사와 죽파의 후계자인 무형문화재 양승희(62)씨가 다른 두 사람이다. 이들의 음악 가문에는 전남 영암, 평양, 중국 옌볜, 서울을 넘나드는 기연(機緣)이 숨어 있다. j가 10일 서울 삼성동 양승희씨 집을 찾아 그 이야기를 들었다.

글=성시윤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스승을 만나다, 득음하다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친정엄마가 평양 분이셨는데, 고향을 못 잊고, 무용가 최승희(1911~67년)를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제 이름도 ‘승희’로 지으셨죠. 네 살 때부터 (한국)무용을 배우게 하시고, 피아노랑 성악도 배우게 하셨어요.”

●그러다 어떻게 가야금은 하게 됐나요

 “원주에 있는 미군 캠프에서 제가 고등학교 때 성가대 활동을 했어요. 성가대 지휘자였던 미국인 선교사께서 ‘너에게는 가야금이 맞는 것 같다’는 얘길 하셨어요. 전라도·서울·원주 등지에 오래 계셨었나 봐요. 주말마다 기차 타고 서울 가서 김정자(전 서울대 국악과 교수) 선생님께 가야금을 배웠어요. 서울 갔다 온 날이면 어머니가 성냥 50개비 놓고, 제가 진양조 한 번 할 때마다 하나씩 옮기며 연습을 하게 하셨어요. 어머니가 졸 때에 제가 슬쩍 몇 개 옮기면, 깨시고 나서 어찌 아셨는지 ‘처음부터 다시 해라’ 하셨죠. 성악이랑 가야금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1969년에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했어요.”

●그때 죽파 선생을 만나신 거군요.

1985년 일본 공연 당시 김죽파 선생이 양승희씨(왼쪽)의 옷고름을 매주고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김정자 선생님이 처음 저를 서울 사직동에 있는 죽파 선생님댁에 데려가셨어요. 남자처럼 무뚝뚝하고, 무섭게 생기셨었어요. 굉장히 위엄 있고, 근엄하셨죠.”(양승희씨가 죽파 문하에 들어갔을 때 죽파는 59세였다. 당시 죽파는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소일을 했다.)

●죽파 댁에서 기거하며 가야금을 배우셨더군요.

 “저를 예뻐하셔서 항상 옆에 두시려 했어요. ‘가야금을 제대로 하려면, 결혼을 하지 마라’는 말도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남자친구를 만나 ‘결혼하겠다’ 하니 시어머니 될 분을 보겠다고 자청하셨어요. 죽파 선생님이 ‘얘는 가야금을 해야 됩니다’ 하시니까, 시어머니가 ‘우리 아들이 4대 독자이니 아들만 하나 낳아주면 선생님께 이 아이를 내놓고 뒷바라지를 하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하셨어요. 76년에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고 퇴원하면서 곧바로 죽파 댁으로 들어갔어요. 선생님이 제 산후조리를 해주셨죠. 남편이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아이 얼굴을 겨우 봤어요. 정말 피눈물 나는 시간이었어요.”

●죽파의 후계자로 선택을 받으셨죠.

 “선생님 댁에서 생활하다가 80년에 제 독주회를 하게 됐어요. 시댁에서 500만원짜리 수표를 하나 주셨어요. 선생님께 초연 작품도 받고 극장 계약할 때 낼 돈이었죠. 선생님께 드려, 선생님이 문갑에 넣어 놓으셨는데, 한 달쯤 지나 극장 계약하려고 ‘돈 주세요’ 하니까 ‘네가 돈 가져간 게 언제인데 지금 돈을 찾느냐’ 하시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돈을 잃지 않으면 선생님을 잃어버린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 제 정신 좀 봐, 죄송해요. 선생님’ 하고 나왔죠. 그러고 나서 얼마나 놀라고 울었는지…. 그런데 일주일 뒤에 선생님이 온 집을 뒤져서 쓰레기통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돈봉투를 찾으신 거예요. ‘너는 어린애가 왜 그렇게 통이 크냐. 500만원을 잃어버리고도 뭐 돈을 가져갔다고’ 하면서 굉장히 야단을 치셨어요. ‘제가 어떻게 선생님을 잃어요. 돈을 잃고 독주회를 안 하는 게 낫지’ 하면서 울었죠. ‘내 후계자는 이 아이다’ 하는 마음을 그때 가지셨다고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어요.”

●스승께서 가야금 실력을 인정해 주셨나요.

 “늘 ‘호리(毫釐·매우 적은 분량) 차이로 내 소리가 아니다’ 하셨어요. ‘죽을 때에 내 손을 너에게 잘라주고 가고 싶다’는 말씀도 여러 번 하셨고요. 89년 돌아가시기 직전에 ‘됐다. 이제 여한이 없다’ 하셨는데, 선생님 돌아가시고 10년 넘게 지나서야 득음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89년 죽파는 직장암으로 타계했다. 슬하에 혈육이 없어 양승희씨가 상주를 맡아 상을 치렀다.)

●죽파의 인생은 어떠했나요.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셨는데, 열 달 만에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할머니 품에서 자라면서 할아버지인 김창조 선생께 가야금을 배우셨대요. 여덟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친을 따라 황해도로 가셨어요. 아버지는 음악을 안 하고 공무원이 되셨어요. 재인(才人)이었던 자기 아버지(김창조)의 삶이 비참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그래서 딸이 가야금 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셨대요. 가야금을 하려면 꼭 기생의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었겠죠.

  죽파가 계속 가야금에 빠지니까, ‘다신 집에 들어오지 마라’ 한 거죠. 할머니가 죽파를 데리고 목포로 와서 양부모를 얻어주셨어요. 그게 죽파가 열 살 때예요. 양부모 배려 덕에 할아버지 제자 중 한 분이었던 한성기(1889~1950) 선생께 3년 동안 가야금을 배우셨어요.”

●결국 기생이 되셨나요

 “열두세 살 때인가 권번(일제 강점기의 기생 조합)에 들어가셨대요. 가야금을 기막히게 타셨는데, 하도 추녀라고 소문이 나서 발을 내리고 공연을 하셨어요. 그런데 손님 중에 선생님을 예쁘게 보신 분이 계셔서 그분께 시집을 가게 됐어요. 경성법대를 나오고 집안도 좋은 분이셨죠. 시집 가시고는 집에 들어앉으셔서 가야금을 타셨어요.”

● 김창조 선생에 대해선 뭐라 하셨나요.

 “생전에 ‘내 할아버지가 가야금 산조를 만든 분이다’라는 얘기를 여러 번 하셨어요. 타계하실 때까지도 ‘어딘가에 할아버지 악보가 있을 거다. 너는 대학도 나오고 했으니, 꼭 좀 밝혀 다오’ 하고 당부를 하셨어요. 그런데 김창조 선생의 수제자 대부분이 월북을 하신 바람에 (그분이) 산조 창시자인지, 아닌지가 (남한에서) 오락가락했던 거죠.”

●죽파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셨나요.

 “‘높이 나는 새는 명중을 당하지 않는다. 높이 비상(飛上)하라’ ‘적대감 가진 사람들에게 예술로 승리하라’ ‘네가 대학교수를 안 하고 (집에) 들어앉아서 예술을 해도 득음을 하면 예술의 향이 십리를 간다’ 이런 말씀을 자주 해주셨어요.”

●결국 득음을 하셨나요.

 “선생님 밑에서 20년 가까이 가야금을 했는데도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음악이 됐다, 안 됐다 하며 요동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악기들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은 가야금 외에 판소리, 병창, 무용, 아쟁, 거문고 이런 것들을 다 하셨어요. 김창조 선생도 가야금, 거문고, 해금, 피리, 단소, 판소리를 다 하셨고요. 그래서 저도 92년 판소리, 철금, 아쟁, 설장구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10년을 꼬박 학생처럼 생활했지요.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연습했어요. 아쟁을 배움으로써 가야금이 낼 수 있는 저음, 슬픈 소리를 얻을 수 있었고요. 철금을 하면서는 높고 청아한 소리를 얻었어요. 음악 어법은 판소리를 통해 얻었고요. 이렇게 10년을 하고 나니까, 어느 날 가야금이 확 뚫리고, 선생님이 원하시던 소리가 자유자재로 나는 거예요. 가야금을 타고 있으면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운보 김기창 화백 그림책을 보면서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운보 그림 중에 금붕어 그림이 딱 하나 있는데, 제가 휘모리를 타니까 금붕어 꼬리가 순간 빨리 움직이는 거예요. 제가 천천히 하니까, 꼬리도 천천히 움직이고요. 금붕어 꼬리에서 찰라의 경험을 한 거죠. 선생님께서 ‘혼(魂)이 가야금 줄에 떨어져야, 네 마음이 움직이고 남의 마음도 움직인다’고 하셨는데, 그 뜻을 알겠더라고요. 역시 가야금의 옳은 소리에 가려면 모든 것을 다 희생해야 하더라고요.”

●득음과 성공을 다 하기는 어려운 것인가요.

 “요즘 애들은 똑똑해요. 누구 뒤에 줄을 서야 성공하는 줄 다 알죠. 다들 빨리 강사 되고, 대학교수도 하고 싶어 하죠. 하지만 득음은 인생을 걸어야 해요. 옳은 소리에 가려면 모든 걸 다 희생해야 해요. 김창조 선생님이나 죽파 선생님도, 현실이 어려우니까 그렇게 좋은 음악을 하실 수 있었던 거죠. 요즘 애들은 기본은 잘 쫓아 하지만 인내심이 부족한지, 하고 싶은 게 많아선지, 어느 정도만 하면 다 된 줄 알아요. 그에 비하면 저희 가문에 온 애들은 정말 예술을 사랑해서 가야금을 하는 애들인 거죠. 예술은, 예술 자체의 길을 지향해야 하는 게 마땅해요.”

스승의 유지를 받들다

●스승인 죽파가 ‘할아버지인 김창조 선생의 악보를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다는 게 무슨 뜻이죠.

 “김창조 선생 때만 해도 악보 없이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악기를 가르치셨어요. 선생의 제자가 몇 분 계셨는데, 그중 직계제자는 안기옥(1894~1974)이라는 분이셨어요. 이분이 김창조 선생으로부터 10년 넘게 가야금을 배우셨는데, 해방 뒤에 월북을 했어요. 그래서 김창조 선생의 산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한에선 정확히 알 수 없게 된 거죠.”

●그럼 어디에서 찾았나요.

 “죽파가 돌아가시고 나서 ‘중국 사람 중에 안기옥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운 사람이 혹시 있느냐’를 수소문했어요. 그러다 90년 김진(1926~2007) 옌볜예술학교 교장을 만나게 됐어요. 한·중 수교하기 2년 전이었네요. 김진 선생은 중국에서 태어나 원래는 바이올린을 하셨는데, 55년에 평양음대에 유학을 갔다가 57년부터 3년간 안기옥 선생한테 가야금을 배우셨어요. 이분이 안기옥 선생에 대해 제게 다 얘기해 주고, 두 트렁크나 되는 북한 논문도 주셨어요. 968편이나 되는데, 거기에 김창조에 대해 국내에서 긴가민가하던 게 다 정리돼 있더라고요. 우리는 ‘인민’이라는 글자만 있어도 기절하던 때잖아요. 그래서 10번쯤 중국을 들락날락하며 자료를 조금씩 감춰 가지고 들어왔죠.”

●거기에 김창조 산조 악보도 있었나요.

 “김진 선생이 하신 일 중에 놀라운 게 있었어요. 김창조 산조를 채보(採譜)하고 녹음을 하신 거죠. 안기옥 선생이 북한에서 1급 인민배우 칭호를 받고, 평양음대 교수를 하고 계실 때였어요. 하루는 안기옥 선생이 ‘자네는 바이올린 하는 학생이라 악보를 그릴 줄 알지’ 하고 묻고는 ‘내가 가야금 한 가락을 세 번 탈 테니 그대로 악보로 만들어봐’ 했대요. 그러고선 ‘자네가 그린 것을 가야금으로 타보라’면서 제대로 됐는지 확인을 했고요.”

●그럼 북한에도 김창조 계보가 있는 것 아닌가요.

 “북한에서는 안기옥 선생 제자였던 정남희(1906~84년) 선생이 김창조 가락을 조금 했어요. 안기옥 선생의 손녀인 안화열씨가 지금 평양음대에서 가야금을 가르치는데 김창조 산조는 안 하고 자기 할아버지 산조만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거기서는 산조가 부르주아 음악이라고 해서 잘 안하고, 현대창작곡을 주로 하고 있어요.”

●김창조 산조를 알리기 위해 어떤 작업을 해오셨나요.

 “김창조 산조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야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유네스코에 등재되려면 학술적 증거가 있어야 하고, 음악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99년에 ‘김창조 산조’ CD를 출판하고, 2001년에 전남 영암에서 산조축제 및 학술대회를 시작해 10년째 하고 있어요. 2004년에는 국가에서 김창조 선생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고요. 내년에는 영암군 지원으로 기념관 착공식도 할 예정이에요.”

●스승의 유지를 이루신 건가요.

 “김창조 선생께서는 고향인 영암 월출산의 깨금바위(가야금바위) 속에서 가야금 산조를 지으셨대요. 제가 몇 년 전에 거기 앉아서 가야금을 하는데 온몸에 전율이 흐르더라고요. ‘죽파 선생님이 저를 아껴주시고 가문을 이루어달라고 소원하신 게 우연한 일이 아니구나’ 싶어요. 죽파도, 김창조도 육신은 가고 없는데, ‘나를 첩첩산중에 데려다가 이렇게 연주를 하게 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대한 예술은 육체가 없어도 후손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지는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죠. 김창조 선생은 남도 일대에서 순회 공연을 하셨고, 그 손녀인 죽파 선생은 일본 공연을 두 번 다녀오셨는데, 저는 이제 카네기홀·링컨센터 같은 데에 가서 산조를 연주하고 있잖아요.”

j 칵테일 >> 가야금 산조(散調)

국악의 한 장르인 산조(散調)는 ‘순수 기악독주곡’이라 할 만하다. 장구 장단과 판소리 음조를 기초로 하고 있다. 1890년 김창조 선생이 가야금 산조를 만들면서 산조의 틀이 완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산조가 생긴 지 올해 120주년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기악 독주가 없었단 얘기인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야국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가야금 비슷한 악기들이 출토된 것을 떠올리면 얼핏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렇다’.

 산조가 생기기 전까지 가야금은 다른 악기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합주(풍류), 무용을 위한 반주, 그리고 무속음악 계통의 시나위를 연주하는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분량도 길어야 5분에서 10분 사이였다. 심방곡이라는 이름의 간단한 독주가 있긴 했지만, 그 길이가 5분을 넘지 않았다.

 이에 비해 김창조가 만든 산조는 40분을 넘는 대곡(大曲)에 해당한다. 서양 음악으로 치면 소나타 같은 형식이라고 할까.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가 나온 이후 한국 음악사는 획기적 전환점을 맞는다. 논산 강경 출신인 백낙준이 김창조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우고서 ‘거문고 산조’를 만들었다. 이후 대금(박종기·강백천), 해금(지용구), 단소(전용선), 퉁소(편재준), 피리(이충선), 새납(한일섭), 아쟁(정철호) 등 다른 악기에서도 산조 창작이 뒤를 이었다. 독주의 재발견, 아니 독주의 발견이 들불처럼 번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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