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17) 차량을 우리 손으로 고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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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일본으로부터 도착한 미군 병사들이 GMC 트럭에 올라타 전선으로 향하고 있다. 그해 가을부터 미군이 대거 참전하면서 군용 차량의 공급이 크게 달렸다. 미군은 그런 부족량을 일제 차량으로 대신했고, 도요타와 닛산 등 일본 자동차는 한국전쟁 특수를 통해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게 중요했다. 모든 것이 부족해 미군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찾아서 먼저 익히고 배워가며 우리의 능력으로 키워야 했던 것이다.

 그때 가장 절실했던 전시 물자 중의 하나가 차량이었다. 북한의 남침이 벌어지면서 미군은 수많은 군용 차량을 끌고 이 땅 위에 올라왔다. 그러나 그들이 끌고 온 자동차는 낯선 땅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미군의 몫이었다.

 커다란 타이어 10개가 달려 있던 GMC의 미 군용 트럭은 최고의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진흙탕에 빠졌어도 바퀴가 6~8개에 불과한 소련제나 일본제 트럭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빠져나왔다. 험한 길에서도 튼튼하면서 10개가 달린 커다란 타이어 덕분에 왕성하게 달렸다.

 그런 트럭은 제한적으로 국군에게 공급됐다. 대부분은 미군이 우선 사용하면서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아울러 미군도 장기적으로 한국전쟁에 뛰어들면서 차량 공급이 한계에 닿기 시작했다.

 그때의 다급한 상황 때문에 들여온 것이 일제 차량들이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미국의 포드와 GM, 크라이슬러 등의 부품을 들여다가 조립해서 생산해 내는 정도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뜨거워지면서 자체적으로 자동차 생산에 나섰던 것이다.

 미군은 일본에 한국 전선에서 당장 필요한 군용 차량들을 만들도록 했다. 아울러 급히 만들어진 일제 차량은 1950년 말 본격적으로 한국 땅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본의 차량 조립 또는 생산이 이뤄졌던 곳은 도쿄와 요코스카 중간에 있는 오파마(追濱)라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일본이 1920~30년대에 운영했던 미국 자동차 조립 공장이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에는 자체적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자동차 공장이 부지기수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본 차량은 닛산(日産), 도요타(豊田) 등이 주류를 이뤘으나 트럭에서는 이스즈(五十鈴)라는 회사의 제품이 가장 우수한 편이어서 국군에 많이 배치됐다.

 대량의 일본 차량이 밀려 들어와 이 땅 위를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지휘관들이 탑승하는 지프는 모두 미제였으나 운반용 트럭과 소형 화물 운반 차량 대부분은 그때부터 일제 차량으로 대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제냐 일제냐를 두고 실랑이를 벌일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전쟁을 수행 중이어서 부족한 물자와 장비는 무조건 어느 것으로라도 일단 채우고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일제 차량은 어쨌든 그런 당시의 상황 때문에 엄청난 수량으로 전선과 후방의 주요 도로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차량이 고장 날 경우에는 일일이 일본 현지로 보내 고칠 수는 없었다. 우리 스스로 고장 난 차량을 고쳐 써야 했다. 부품 등은 미군이 일본 현지에서 구매해 배급을 해준다고는 하지만, 고치는 기술 정도는 우리 스스로 익히는 게 마땅했다.

 육군본부에서 군용 차량을 관리하는 곳은 병기감실이었다. 당시 안동순 준장이 병기감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나의 지시로 일본 오파마를 밥 먹듯이 다녀와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병기감이 이끌고 있는 차량과 관련이 있는 기술 요원들 모두 일본의 오파마를 자주 오가면서 차량 수리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일제 때 벌써 일본인들에게서 자동차 기술을 배우고 익힌 사람도 있었지만, 전쟁 중에 대량으로 들어온 미제와 일제 차량을 고치거나 매만져야 하는 막대한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사람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군에서는 눈코 뜰 새도 없이 꾸준하게 그런 인력을 양성해야 했다.

 오파마에는 그렇게 일본 현지에 가서 자동차 정비 기술과 조립 관련 기술, 부품 생산 시설을 직접 보고 익히는 대한민국 군인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배워왔다. 전쟁 중이라 달리 여유가 없기도 했다. 게다가 무엇이든지 재빨리 배우는 게 한국인들이었다. 그들은 오파마를 오가면서 부지런히 배우면서 새로운 기술을 응용하기 시작했다.

 ‘차량재생창(車輛再生廠)’은 그래서 생겨났다. 아예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미 군용 트럭이나 일본제 차량이 하역됐던 부산항 부두 인근의 차량 적재 장소에 본격적으로 정비소를 확장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부산 서면에 해당하는 장소였다.

 제법 큰 규모였다. 그러나 전쟁이 3년 동안 이어지면서 이 차량재생창은 하루가 다르게 규모를 키워 나갔다. 이곳에서 우리는 전선이나 후방에서 운행하다 망가진 자동차를 대부분 고칠 수 있었다. 부족한 부품은 미군으로부터 받아다가 썼지만, 웬만한 고장은 이곳에서 정비해 수리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져 갔다.

 지금이야 한국의 자동차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그때 ‘한국 자동차’는 없었다. 그저 미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차량이 고장 나면 수입한 부품으로 고치는 수준이 전부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자동차의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구조를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나아가 그 내부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때의 우리 노력은 매우 중요한 걸음이라고 볼 수 있다.

 바람과 비를 막을 수 있는 시멘트 블록을 찍어내면서 우리의 중동과 세계 건설시장 진출의 역사는 막을 올렸는지 모른다. 대구와 부산에서 대량으로 군복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1970년대 무역 강국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부산항의 한쪽 차량재생창에서 손에 들었던 망치가 세계적인 자동차 강국으로 부상한 오늘의 한국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국인들은 그런 전쟁 중에도 재빨리 모든 것을 익혀가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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