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아일랜드 디폴트 선언 내버려두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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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호 24면

유럽 아일랜드의 재정위기가 다시 불거졌다. 포르투갈도 위험 수준이다. 스페인으로 불길이 번질 수 있다는 음울한 시나리오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유로사용권(유로존) 리더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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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잖은 전문가들은 아일랜드와 포르투갈 사태가 그리스 재정위기와 마찬가지로 유로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주장했다. 또 많은 전문가들은 유로 시스템이 위기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

요즘 유럽 리더들이나 글로벌 시장 참여자들은 그리스나 아일랜드·포르투갈이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에서 억제하기로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끝내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지진(통화 시스템 해체)이 발생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통화 시스템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두 나라의 디폴트나 극심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통화 체제가 해체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통화 시스템이 끈질기게 살아남는 경향을 보였다. 심각한 정치적 격변이 발생해야 통화 시스템이 흔들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요즘은 금이나 은이 중앙은행권의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다. 한 나라의 돈은 발행국 정부가 돈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돈이다. 정치·경제를 포괄하는 국가 시스템 자체가 통화의 보증 장치다. 한 사람의 말이 신뢰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의 전체 인격이 뒷받침돼야 하듯이 한 나라의 돈이 시장의 믿음을 얻기 위해선 국가 전체가 믿을 만해야 한다.

유로 체제의 생명력이 끈질길 것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미국 달러 시스템이다. 우리는 통화 시스템이 통일되지 않았던 미국 독립 초기 모습을 상상하지 못한다. 미국 통화 시스템은 탄생 순간부터 지금 같은 체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초기 통화 시스템은 지금 모습과 딴판이었다. 중앙은행 시스템도 변변찮았다. 심지어 19세기 중반 이후 근 70년 정도는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화폐 단위가 달러로 단일화되기는 했지만 통화 발행권을 놓고 연방과 주 정부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미 금융 전문가들조차 초창기 통화 시스템이 “원시적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미 달러 체제는 상당 기간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경쟁과 갈등, 타협을 거친 뒤에야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유럽 대륙 16개 나라가 옥신각신한 끝에 유로라는 단일 통화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과 비슷했다. 단일 통화 달러 시스템이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춘 이후에도 많은 주 정부가 재정위기를 겪었다. 몇몇 곳은 디폴트를 선언하기도 했다.

심지어 20세기 후반에도 지방 정부들이 채무를 제때 이행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1975년엔 뉴욕시 정부가 파산했다. 95년에는 오렌지카운티가 복잡한 파생상품 게임을 벌이다 두 손 들고 디폴트를 선언했다. 이번 금융위기 여파로 캘리포니아와 일리노이 주정부는 극심한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사실 캘리포니아나 일리노이가 빚을 제때 갚지 못할 확률은 그리스나 아일랜드보다 높다.

그런데도 달러 체제는 여전히 생존하고 있다. 지역 정부들이 유로 회원국과는 달리 재정적자를 GDP 3% 이내에서 억제하기로 약속하지도 않았다. 지방 정부들이 알아서 재정균형을 달성하기 위해 자체 규정을 정해 노력하고 있다. 지방 정부가 위기에 빠져도 연방정부가 구제작전을 벌일지가 불투명하다. 사실 미국 주정부 몇 곳이 채무를 제때 이행하지 못하면 금융시장이 요동할 가능성이 크다. 금리가 급등하고 자금이 마를 수 있다. 시중 금리가 오르면 연방정부가 채권을 발행할 때 이자 부담이 커진다. 기업들이 자금을 조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이런 금융시장 불안과 긴장을 덜어주기 위해 연방정부가 주정부 디폴트를 수수방관하지 않을 수 있다.

유로 시스템 붕괴가 말처럼 쉽지 않은데도 유로존 회원국들이 내놓은 처방은 하나같이 그리스나 아일랜드의 디폴트 선언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선 유로존 회원국들은 재정적자를 GDP 3% 이내로 줄이는 기존 약속을 재확인했다. 위기 당사국인 그리스나 아일랜드·포르투갈뿐 아니라 스페인까지 재정 긴축 계획을 내놓았다. 이어 독일과 프랑스 등 유로존 중심국들은 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나 아일랜드에 구제금융 제공을 약속했다. 심지어 위기를 맞은 나라들이 디폴트를 선언하면 모두 나서서 대신 갚아줄 뜻이 있다고 천명하기도 했다.

오히려 구제금융이 화근일 듯하다. 유로 회원국들이 약속한 대로 그리스나 아일랜드·포르투갈·스페인 등 유로존 주변부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면 유로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할 듯하다. 구제금융을 위해 각국이 세금을 더 거둬들여야 한다. 독일과 네덜란드·오스트리아 등 유로존 중심부 사람들의 세금 부담이 무거워진다. 그만큼 그들의 불만이 커진다. 사태가 이쯤 되면 중심부 사람들은 유로존 탈퇴를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시원찮은 주변부를 배제하고 경제적으로 튼튼한 국가만이 참여하는 새로운 단일 통화를 출범시키기 위해서다. 이 또한 유로 시스템의 붕괴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선 디폴트 사태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주변부 국가들이 견디지 못하면 디폴트를 선언하도록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



정리=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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