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13) 상이용사의 문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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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한참 뒤인 1967년 강원도 속초에서 군복 차림에 목발을 짚은 상이용사가 걸어가고 있다. 전쟁은 수많은 생명의 희생과 함께 몸을 다친 상이군인들을 쏟아냈고, 이들에 대한 처우 문제가 사회 현안으로 떠올랐다. 종군작가 고 이경모씨가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은 사진이다.

장교들보다 훨씬 더 생활이 절박한 사람들이 상이(傷痍) 군인들이었다. 느닷없이 닥친 전쟁으로 전선에 뛰어나가 적의 총탄과 포탄에 몸을 다친 군인들 말이다. 그들의 처우 문제는 일종의 시한폭탄이었다. 당시엔 전시여서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조국의 전선을 지키기 위해 젊음을 던진 이들을 돌보는 일은 아주 시급했다.

 그 일이 급기야 터지고 말았다. 1952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신태영 국방장관이 전화로 나를 급히 찾았다. “지금 상이군인들이 부산역을 점거한 채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빨리 와서 해결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시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L-19 경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날아갔다.

 부산역은 그야말로 상이군인 천지였다. 수만 명의 상이군인이 부산역은 물론이고, 인근까지 점거하고 있었다. 상이군인들은 거칠었다. 전쟁터에서 몸의 일부를 잃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져 마음마저 찢겨 있던 그들이었다. 그러니 불만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그 정도가 어느 누구보다도 격렬했다. 그들의 과격한 행동을 막고 있던 문봉제 치안국장도 지쳐 있는 표정이었다.

 문 치안국장으로부터 사연을 들어보니 경북 왜관에서 상이군인과 경찰이 충돌해 상이군인이 다쳤다는 것이다. 이 사건 내용을 듣고서 부산 일대 상이군인들이 모두 몰려 나와 역을 점거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부산 일원에 흩어져 있던 육군병원과 정양원 등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군인들이었다.

 왜관으로 가는 열차 편을 요구하다가 내친김에 자신들이 머물고 있던 병원과 정양원의 시설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식사는 물론이고, 모포가 모자란다거나, 천막 안이 불결해 이가 들끓고 있다는 등의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역 광장에 앉아 거칠게 목발 등을 흔들며 항의했다. 그 불만을 가라앉힐 방법은 좀체 없어 보였다.

 내가 나섰다. 나는 마이크를 들고 “우선 진정하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나는 육군참모총장 백선엽입니다”라고 내 소개를 했다. 광장이 잠시 조용해졌다. 격렬한 구호 등이 가라앉았다.

 나는 이어 “나는 행인지 불행인지 살아남아 여기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몸을 다쳐 여기서 이런 불만을 터뜨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 형편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즉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책임 아래 여러분이 바라는 사항들을 성심성의껏 해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표자를 뽑아 나와 이야기합시다”라고 제안했다.

 상이군인 대열이 잠시 웅성거리는가 싶더니 각 수용소 대표 30여 명이 앞으로 나왔다. 나는 그들과 차례로 악수를 하다가 아는 얼굴 하나를 만났다. 나는 “자네, 나를 알겠지”라고 물었다. 그는 자세를 바로잡더니 “예, 각하. 어느 고지에선가 각하에게서 담배 한 대를 얻어 피운 일이 있습니다”라고 힘차게 말했다.

 “그래, 이 사람아. 고지에서 나와 함께 담배를 피워 물었던 사람이 이렇게 하면 쓰겠어!” 나는 책망 조로, 그러나 애처로움과 반가움이 들어 있는 마음으로 그를 꾸짖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 내 부하였다. 상이용사들은 상관을 믿고 전선에서 몸을 던지면서 적을 막았던 사람들이었다.

 ‘적 앞에서 함께 피워 물었던 담배-.’ 전선을 함께 누볐던 사람들 사이에는 말로는 뭔지 형언키 어려운 동지(同志)로서의 우애와 신뢰감이 흐른다. 그것은 총탄이 마구 날아드는 전선에서 함께 싸웠던 사이가 아니라면 공감하기 어려운 정서이기도 했다. 그런 감정이 통했던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차렷 자세로 돌아서더니 “네, 각하. 안 하겠습니다. 즉각 해산시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나섰던 각 수용소 대표도 나와 그 사이에 흘렀던 동지로서의 느낌을 전달받았던 모양이다. 그들이 나서서 모두를 해산했다. 함께 전선을 누볐던 나를 믿는다는 분위기였다.

 특히 나와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우며 전선의 적을 막았던 그 친구는 상이용사 대열의 지도자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나서서 몇 마디를 하자 대열이 금세 흩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곧 휩싸였다.

 그것은 엄연한 약속이었다. 당장 전선을 떠받치기에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상이군인들을 홀대한다면 전선으로 나갈 젊은이들의 의지가 꺾일 게 분명했다. 결국은 돈이 문제였다. 부족한 예산을 어떻게 해서라도 잘 운영해 이들을 지원하는 게 당연한 순서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찾아간 곳은 미 8군 사령부였다. 정부 예산으로는 당장 저들과의 약속을 실행할 돈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8군 사령관 테일러 장군에게 부산에서 벌어졌던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미 군사고문단장 라이언 장군도 발 벗고 나섰다.

 미군의 지원으로 모포 수만 장과 목제 침대 1만 개 정도를 얻을 수 있었다. 미군 창고는 당시 부산에 있었기 때문에 지급이 아주 빨랐다. 이로써 부산 일대의 병원 등에 수용돼 있던 상이군인들의 처우를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었다.

 나는 정부에 상이용사의 급양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예산 증액을 요청했다.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던지 보건사회부가 나서 즉시 상이군인 급양비를 올려주는 조치를 취했다. 그런 돈으로 나는 각 육군병원 군의관들을 동원해 전 육군병원과 정양원의 급양 및 시설 여건을 개선했다.

 그러나 길거리를 떠도는 상이용사들의 불만도 문제였다. 생계 대책이 별로 없는 수많은 상이용사가 전국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무임승차는 물론이고, 식당에 들어가 소란을 피우면서 공짜로 음식을 먹는 무전취식은 아주 흔했다. 아예 위협을 하면서 구걸 행위를 벌이는 상이용사들도 점차 눈에 많이 띄기 시작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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