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욱의 경제세상] 오바마의 편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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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호 02면

한 떠버리가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 같은 컴퓨터란 말이지.” 떠버리가 답했다. “그렇지. 자기가 잘못해놓고 다른 컴퓨터 탓이라고 돌려대거든.”

G20(주요 20개국) 서울 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이 이러했다. 환율전쟁과 무역불균형이 남 탓이라고 했다. 압권은 미국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개막 전 각국 정상들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 경제가 회복되면 글로벌 경제회복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살리기에 세계가 나서 달라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래왔다. 세계가 미국을 살리는 데 앞장서왔다. 막대한 무역·재정적자로 허덕이는 미국이 흔전만전 소비할 수 있었던 건 다른 나라 덕분이었다.
특히 아시아와 중동 국가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고스란히 미국으로 보낸(미국 채권 매입) 때문
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그 사실은 잊은 채 남들이 자기 덕분에 살았다는 것만 기억한다.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편지가 발송된 건 그래서다. 이젠 달라지겠다고 한다. 소비를 버리고 절약하면서 수출도 두 배로 늘리겠단다. 그렇다면 수순은 달러값 떨어뜨리기다. 겉으론 중국을 겨냥하지만 실은 세계를 상대로 하는 무차별적 게임이다. 양적 완화 정책이 그것이다.

남 탓하는 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미국의 과소비 덕분에 급성장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무역흑자와 외환보유액이 급증한 건 미국 시장이 활짝 열려서였다. 하지만 이젠 거꾸로 미국의 과소비 탓을 한다. 남 탓만 하는 사람들이 서울에 모였으니 결과는 뻔할 수밖에. 환율전쟁 종식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났다. 그나마 승자는 미국이다. 일본과 독일의 팔을 비틀어 강제로 목적을 달성했던 과거에 비하면 성에 안 차겠지만. 그래도 양적 완화를 통해 달러값을 떨어뜨린 건 사실상 인정받았다. 세계가 돕지 않으면 파국으로 갈 수 있다는 시위(?)를 세계가 사후 승인한 셈이다. 같이 돈값을 떨어뜨리겠다는, 그럼으로써 달러 절하의 효과가 반감되는 걸 막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경상수지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로 합의한 효과다. 미국으로선 중국만 타깃으로 삼을 이유가 별로 없다. 중국만 미국에서 흑자를 보는 게 아니며, 중국만 미국 국채를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단기 정책으로 양적 완화 정책만 한 게 없다. 수출 증대와 원리금 상환 부담의 감소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어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영향력을 대폭 강화한 것도 큰 성과다. 줄어드는 미국의 힘을 보완해줄 수 있다.

중국도 승자다. 자국에 집중되던 절상 압력을 미국 탓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왕따’ 신세를 벗어났다. 게다가 미국의 양적 완화 정책으로 중국이 큰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위안화 값은 오르겠지만 다른 나라 돈값도 같이 오른다면 경쟁력은 그리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위안화 값만 오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IMF 지분을 늘린 것도 큰 성과다. 의심이 드는 건 그래서다. 미국과 중국이 승자인 건 서로 공모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다. 미국은 여전히 중국 돈이 필요하고, 중국은 아직도 미국 시장이 필요하다. 전면전은 시기상조며, 적어도 상당기간 오월동주(吳越同舟)해야 한다는 걸 양국이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겉으론 으르렁대지만 물밑에선 모종의 타협을 전개했을 수 있다.

환율전쟁 종식은 G20으로는 안 된다는 건 분명해졌다. 미국 경제의 안녕에 달려 있다는 것도 확인됐다. 미국이 회복하지 못하면 환율전쟁 종식은 없다. 불행히도 그럴 가능성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수순은? 무역전쟁이다. 시끄럽긴 해도 약발이 잘 듣는다는 건 미국이 경험한 터다.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게다. 단정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불확실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건 맞다. 문제는 우리다. 혹여 있을지 모를 높은 파고를 피해나갈 대비책 마련이 필요하다. 경제에 강하다고 해서 뽑아준 정권이기에 하는 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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