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08) 이승만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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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1910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의 모습. 그의 나이 35세 때다. [사진 출처=『이승만의 삶과 꿈』(유영익 지음)]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단지 당시의 대한민국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을 이끄는 데 필요한 능력을 고루 지닌 탁월한 인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성격 이야기를 한 김에 조금 덧붙일 게 있다.

 이 대통령은 사람의 자질을 따질 때 능력을 우선시하는 쪽이었다. 그 사람이 어느 지역 출신인지, 아니면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느 부모 밑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를 따지기보다는 능력을 우선 살폈다.

 한국인 각료나 공무원 또는 이 대통령과 자주 상대했던 미국의 고위급 인사나 장성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대통령은 가끔 상대방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는 했다. 경무대 응접실에서 손님을 만난 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따금씩 인물평을 들려줬던 것이다. 대통령이 상대방을 보는 기준은 한결같았다. 대부분 “저 사람은 와이즈(wise: 현명)하지 못해”라거나 “저 사람 제법 와이즈해”였다.

 대통령이 사용했던 영어 단어 ‘와이즈’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지혜롭다’ ‘현명하다’였다. 이는 당시 80세를 바라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인물을 보는 데 늘 따랐던 기준이었다. 그 사람의 학식이나 출신 지역 등 다른 조건보다는 사물이나 현상을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먼저 따지는 식이었다.

 상대를 그런 식으로 가늠하는 대통령 스스로는 따라서 매우 노련한 전략가이자, 자신 앞에 놓인 상황을 꼼꼼히 살핀 뒤 행동으로 옮겨가는 사세(事勢)의 날카로운 관찰자였다. 대통령의 그런 성격은 현실적으로 소용이 닿지 않는 이야기, 공리공담(空理空談)을 피하는 쪽으로 나타나고는 했다.

 남들은 이 대통령이 무척 까다롭다는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 대통령이 걸어온 발자취 자체가 범인(凡人)들이 함부로 흉내 내기는 어려운 것이었고,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쌓아온 학식의 높이와 경륜의 깊이는 남다른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통령 앞에 가면 대부분 주눅이 들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대통령은 따지고 보면 매우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결코, 무리한 생각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늘 현실 감각을 유지하면서 시세(時勢)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따져 거기에 판단의 기준을 맞추는 식이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군을 이끌고 있던 내가 대통령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런 대통령의 성격과 통치 철학의 근간을 잘 읽어야 했다. 대한민국은 출범 2년 뒤에 혹심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를 겪었고, 당시에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나온 중공군과 한반도의 중간지대에서 격렬한 고지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그때의 대한민국이 가장 핵심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안보의 초석(礎石)인 국군의 역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일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사명감, 일선을 전전하면서 늘 적과 싸웠던 군인으로서 내가 유지해야 할 소명(召命)의식에 충실해야 했다.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군을 무척 아꼈다. 불과 2년 전, 느닷없이 당한 6월 25일의 아픈 기억이 늘 대통령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국군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80을 바라보는 노구(老軀)를 이끌고 사단 창설식 등에 분주하게 다녔다.

 이 대통령은 몇 차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데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다. 대표적인 게 6·25가 발발한 뒤 서울을 내주고 후퇴할 때였다. 대통령은 기차 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에 도착했다. 그때의 참담한 심정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은 “이대로 후퇴만 할 수는 없다”면서 대전에서 버틸 각오를 보였다.

백인엽(87) 당시 17연대장

 당시의 전선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지연전을 펼치면서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때 대통령은 독립 17연대의 재창설식을 대전에서 지켜봤다. 당시 17연대장은 내 동생 백인엽 대령이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17연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 장정들로 연대병력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참담한 여건 속에서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이자 국군의 통수권자인 이 대통령이 창설식에 참석했다. 무너지는 전선,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전쟁국면, 퇴로를 가늠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의 대통령은 그 창설식을 지켜보면서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동생 인엽이 말해 줬다.

 그 뒤로 대통령이 국군에 보여준 애정은 남달랐다. 그는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전쟁 뒤에는 군인들이 쓸데없이 경무대나 그 주변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군인들이 이런 데 자주 나타나는 것은 좋지 않아. 나라 지킬 생각에만 몰두하는 게 군인이야”라면서 자주 호통을 쳤다.

 나는 다른 것은 몰랐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이 어떤지를 따져볼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저 강한 국군을 육성해 대한민국의 기반을 단단하고 반듯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게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그 밑에서 실무를 책임져야 할 나의 시대적인 사명이었다.

 이 대통령은 당시까지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매우 이성적이었다. 북한군에 쫓겨 서울을 내주고 대전에 내려왔을 때 흘린 대통령의 눈물에는 짙은 회한(悔恨)의 정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전비(戰備)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로 북한의 김일성에게 뼈아픈 일격을 당했고, 그 뒤로 나라를 지킬 튼튼한 국방력 구축에 절치부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 그 시대가 내게 부여한 사명을 완수해야 했다. 미군의 협조를 얻어내 대한민국이 도약할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야 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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