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날인 거부 '아름다운 손가락' 건반 위 춤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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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쇼팽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서울에서 음악회를 여는 재일동포 피아니스트 최선애(左)씨와 첼리스트인 일본인 남편 미야케 스스무.

1989년 봄 미국 인디애나 음대 구내 서점. 3년전 이 학교에 유학 온 재일교포 출신 피아니스트 최선애(45)씨의 눈을 사로잡은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쇼팽이 21세때 떠나온 고국 폴란드를 그리워하며 쓴 249통의 편지를 엮은 '쇼팽의 편지'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눈시울을 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태어난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재일교포의 인권회복 운동에 평생을 바쳐온 고 최창화 목사의 장녀로 태어난 그는 지문날인을 거부한 채 8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LA행 비행기가 나리타 공항을 이륙하는 순간 일본 당국은 그의 영주권을 박탈했다. 최씨는 180일 체류만 가능한 신규 입국자 자격으로 돌아온 후 체류 연장을 거듭하며 법정 투쟁을 계속하다 14년만인 2000년 4월 마침내 영주권을 되찾았다.

한일 우정의 해를 맞아 최씨의 실화를 다룬 연극이 서울에서 상연된다. 24~25일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초연되는 '선택'. 일본 작가 쓰쓰미 하루에(提春惠.55)가 쓴 희곡 '최종 목적지는 일본'의 한국판 제목이다. 최씨가 영주권 회복 직후 출간한 '내 나라를 찾아서'라는 수기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연극 공연에 앞서 22일 같은 장소에서 최씨가 인디애나 음대에서 만나 결혼한 일본인 첼리스트 미야케 스스무(三宅進)와 함께 조촐한 음악회를 연다. 쇼팽의 피아노 독주곡과 첼로 소나타 등을 연주하면서 막간에 최씨가 쇼팽의 편지를 직접 낭송한다.

극은 89년 6월26일 LA 공항에서 시작된다. 도쿄를 경유해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002편에 탑승한 재일교포 3세 하송애(최씨의 극중 이름)는 미국 어학연수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는 가타키리 마리코의 질문을 받는다. 마리코의 본명은 이신자. 그는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던 터였다.

"왜 재입국을 막는 일본으로 굳이 돌아가려는 거죠?"

"일본 영주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본 기야마(木山)프로덕션이 제작하는 이 작품은 등장인물이 모두 일본 배우들이다. 일본어로 상연되지만 관객들은 이어폰으로 성우 김종성.장유진씨의 동시 통역으로 즐길 수 있다. 최씨의 남편 미야케는 주인공의 애인 역할로 잠시 출연하고 공연 내내 첼로 연주로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선택'은 서울 공연에 이어 28~29일 부산시민회관 소극장, 다음달 13일 도쿄 록폰기 배우좌극장 무대에 오른다. 02-742-9870.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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