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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화산이 창조한 신세계, 마치 다른 행성에 온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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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호 08면

1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괴레메 계곡과 바위산 전체가 마을인 우치히사르.

최고의 야외박물관
카파도키아를 찾을 때마다 나는 자동차 대신 모터사이클을 빌린다. 좁은 길을 따라 늘어선 유적지를 둘러보는 데 모터사이클이 최적이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먼저 찾아가는 곳은 해발 1300m 높이에 자리한 괴레메(Greme) 언덕이다.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란 이름은 왜 붙었을까. 평탄한 언덕에 서면 마을과 계곡은 물론이고 멀리 만년설로 덮인 하산 산까지 시선에 들어온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기암괴석이 즐비한 계곡과 완만한 경사를 이룬 경작지가 연출하는 풍광은 다른 행성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사진작가 이형준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 복합유산을 찾아서 <8>터키 카파도키아

신비로운 풍광은 신성대 3기와 4기 때 발생한 화산폭발로 조성됐다. 에스지에스 산과 하산 산 등이 폭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엄청난 화산재가 카파도키아와 주변을 모두 덮었다. 두께가 수십 미터에 달했던 화산재는 오랜 세월 진행된 풍화와 침식작용 끝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기암괴석과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카파도키아 복합유산 지역은 인류가 소유한 ‘야외박물관’ 중 최고다.

2 주민들이 살고 있는 동굴 주거지. 지금도 1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런 동굴에서 살고 있다.3 괴레메 야외미술관에 있는 동굴성당.4 근사한 바위 속에 만든 집. 만화영화에 나오는 스머프의 집을 연상시킨다.

SF 영화 연상시키는 기암괴석
삼각부채꼴 모양의 복합유산 지역은 작은 마을 괴레멘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위르귀프, 서쪽으로 네브쉬힐, 그리고 북쪽으로 아바노스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수십 곳에 달하는 유적지를 상징하는 곳으로는 괴레메 계곡, 젤베 계곡, 그리고 야외미술관을 꼽을 수 있다. 괴레메 계곡은 마을에서 가깝다. 원뿔, 버섯, 도토리, 미사일을 연상케 하는 희귀한 모양의 기암괴석들은 높이가 10~40m에 달한다.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도 대략 1만 개가 넘는다. 괴레메 계곡은 SF영화에서 본 쥐라기 시대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런 느낌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기암괴석들은 아무리 살펴봐도 침식과 풍화작용보다 땅에서 곧장 솟아오른 것처럼 보인다. 화산폭발로 조성된 암석은 어두운 색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좀 다르다. 밝은 색상부터 검정까지 꽤 다양하다.

괴레메 계곡 북쪽에는 광활한 젤베 계곡이 있다. 젤베 계곡은 괴레메 계곡에 비해 모양도 단순하고 색상도 단순하다. 그러나 넓은 계곡에 조성된 대열을 갖춘 듯 서 있는 바위와 외롭게 주변을 응시하는 괴석들은 솜씨 좋은 장인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가까이 접근해 살펴보면 모양과 크기는 물론 진행과정이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5 동굴 주거지 입구에 마련된 부엌에서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주민.6 도자기로 유명한 아바노스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이 자신의 공방 앞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새겨 넣고 있다.7 전통 복장을 입은 주민이 당나귀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모습. 당나귀는 주요 교통수단이다.

순수 비잔틴 예술의 진수를 만나는 곳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 명소는 괴레멘 마을 남쪽 2㎞ 지점에 조성된 야외미술관(Open Air Museum)이다. 수십 개에 달하는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야외미술관을 둘러보려면 좁은 길과 사다리를 이용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외관과 다르게 실내는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직사각형 모양부터 작은 돔을 갖춘 공간까지. 최초 은둔자들이 거주했던 동굴은 단순한 사각형인 데 비해 8세기 이후에 건설한 유적지는 훨씬 세련되고 구체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굴에 들어서면 어두움에 잠시 당황하게 된다. 동공이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벽과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야외박물관을 구성하는 수십 곳에 달하는 동굴에는 어김없이 그림과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이 그림과 조각은 대부분 9세기 말에서 11세기 말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물론 동굴에는 4세기 때부터 그림들이 그려졌다. 초기 작품은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사이에 비잔틴 제국에서 일어난 성상파괴 운동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야외박물관을 구성하는 동굴유적지는 모두 소중한 인류의 재산이다. 그중 ‘큰 비둘기 집 성당’이란 의미의 차부신킬라세와 ‘어두운 성당’이란 뜻의 차리클리킬리세,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토칼리킬리세 성당의 천장화와 벽화는 탄성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은둔자의 공간답게 야외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은 여타 비잔틴 미술과 다르게 하나같이 소박했다.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는 생활공간
매혹적인 기암괴석은 바위 이상의 의미가 있다. 현재 카파도키아에는 동굴을 주거지로 이용하는 주민이 꽤 많다. 7세기 이후 수백 년 동안 6만 명이 넘는 주민이 동굴에 거주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편리를 쫓아 동굴 주거지를 떠나면서 지금은 1만여 명 정도만 동굴에서 생활하고 있다. 토착민의 생활공간인 동굴 주거지는 가족 수와 용도에 따라 크기와 구조가 다르다. 서너 명이 함께 살 수 있는 아담한 공간부터 수십 명이 생활하는 데 불편이 없을 정도로 넓은 주거지까지 다양하다. 공동 공간과 독립된 공간으로 이루어진 동굴 주거지는 여느 주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은 비밀통로와 환기시절을 갖춘 점 정도. 아무리 부드러운 돌이라지만 바위를 파서 복잡한 비밀통로를 갖추는 데 소요된 시간과 땀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이들이 동굴에 어렵게 시설을 갖춘 이유는 이교도로부터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정된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지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바위를 파 만든 수납장과 아이들을 위한 장식은 지혜의 끝이 어디인지 끝없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새의 배설물을 과일나무 비료로
괴레멘 마을과 카파도키아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대대로 집과 주변에 새를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주민들이 새집을 만들어 놓은 이유는 배설물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괴레메 계곡과 주변 농경지는 척박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복합유산 지역에 조성된 농경지는 어느 곳보다 비옥하다. 화산재와 응회암이 주류를 이룬 척박한 땅이 옥토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조류 배설물 덕분이었다. 비둘기와 흡사한 바위자고새를 비롯해 십여 종이 넘는 새들은 집 주변과 동굴에 천연비료인 ‘구아노’로 불리는 다량의 조분석(鳥糞石)을 선물했다. 조류들이 준 선물은 카파도키아를 터키 최고의 과일 산지로 만들었다.

한편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복합유산 지역은 동식물의 안식처다. 회색여우, 오소리, 흰담비수달, 늑대와 다양한 조류, 그리고 잎엉겅퀴 등 100여 종이 넘는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그러나 여행객이 야생동물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여섯 차례나 찾았던 나의 경우도 오소리와 두 차례 대면한 것을 제외하면 어떤 야생동물도 보지 못했다. 카파도키아 복합유산 지역에는 위에서 언급한 장소 외에도 명소가 즐비하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그리스도 교도들이 살았던 데린쿠유와 카이마클리에 조성된 지하도시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류의 흔적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카파도키아는 자연과 인간과 동물이 함께 만든 복합유산 지역이다.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방에 남아 있는 이 아름다운 합작품은 주변에서 발생한 지진과 많은 방문객으로 인해 최근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미 일부 동굴 유적지는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 다음 호에서는 스페인 이비사 섬을 찾아갑니다.

여행 메모
가는 길 :인천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는 직항 편을 이용하면 11시간이면 갈 수 있다. 이스탄불에서 카파도키아 중심지 괴레메까지는 렌터카와 버스를 이용해 갈 수 있으며 소요시간은 10~12시간이 걸린다. 터키는 3개월 동안 비자 없이 자유롭게 여행이 가능하다.


사진작가이자 여행작가.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한 뒤 20여 년 동안 130여 개 나라, 1500여 곳의 도시와 유적지를 다니며 문화와 자연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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