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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 흔드는 한국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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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은행의 보고서 한 줄이 국제외환시장을 뒤흔든 이후 한은의 국제적 위상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국내외에서 꼬리를 물고 있다. 20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의 자산 구성을 달러 아닌 다른 통화로 바꿀 계획이란 뉴스가 전해진 다음날 뉴욕증시의 다우지수가 174포인트나 빠지고 유로화에 대한 달러가치가 1.4% 급락했다. 한은의 해명으로 소동은 바로 가라앉았지만 이 와중에 원-달러 환율도 한때 1000원이 붕괴되는 부메랑을 겪었다.

"한은이 국제금융시장의 큰손이 됐다" "세계가 한은을 주시하고 있다"는 우쭐대는 평가가 나오는가 하면 "미국의 경제대통령 앨런 그린스펀의 코가 납작해졌다" "그린스펀보다 일본.중국.대만.한국.인도.홍콩의 중앙은행장들이 미국 통화정책에 더 중요한 인물이 됐다"는 일부 해외언론의 논평도 분위기를 띄웠다. 과연 그럴까.

미국은 하루 평균 20억 달러의 외자를 끌어다 적자를 메우고 있다. 외국빚이 국내총생산(GDP)의 25%에 이른다. 미국 국채의 47%를 외국인이 갖고 있고 세계 중앙은행들의 보유외환 중 3분의 2가 달러자산이다. 따라서 외자가 지속적으로 유입되지 않거나, 이들이 보유한 국채나 달러를 한꺼번에 내다 팔 경우 미국은 지탱이 안 된다. 일본이나 중국 등이 마음만 먹으면 미국을 골탕먹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 현실은 아니다.

달러를 내던지면 달러가치 하락과 동시에 그들 통화는 절상된다. 이들이 보유한 달러가치는 저절로 급락한다. 외자 유입이 안 되고 미국 경제가 휘청하면 미국의 소비와 지출이 줄고 이는 상대국들의 대미수출 급감으로 되돌아온다. 서로 물고 물리기 때문에 달러 내던지기는 그 속성상 모두가 지는 게임이다.

달러 불안의 근본원인은 미국의 과다한 소비와 여타국들의 과다한 저축 간의 글로벌 불균형에 있다. 미국이 적자를 내면서 과다소비 해주는 덕에 상대국들이 먹고사는 격이다. 특히 아시아 주요국들은 그들 통화를 저환율로 유지하고, 대신 달러화를 지속적으로 매입해 주면서 현상(status quo)을 유지해오고 있다. 미국과의 일종의 '묵계'다.

미국의 경제규모, 특히 막대한 금융자산(33조 달러)에 비하면 미국의 적자문제가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투자처이자 새로운 기술과 혁신의 1번지다. 가장 크고 자유롭고 개방된 시장이며 경제의 활력(연 3.8% 성장)도 유럽(1.6%)을 압도한다. 게다가 유로화는 기축통화로서 달러를 대신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하지만 그린스펀 말대로 미국의 과다소비와 적자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는 없다. 글로벌 불균형의 시정 과정에서 달러의 약세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물고 물리는 게임이기 때문에 충격없이 서로가 관리 가능한 선에서 달러가치 하락을 안정적으로 유도하는 일이 중요하다. 제2의 플라자 합의 같은 국제공조가 요청되는 사정도 이 때문이다.

달러의 과다보유로 인한 비용은 물론 무시 못한다. 그러나 저환율에 따른 수출증대 등 그로 인한 국가적 혜택들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 달러 보유가 우리의 3, 4배인 중국과 일본은 잠자코 있는데 '넘치는' 달러를 주체 못하는 양 호들갑떠는 우리 자신이 절로 우습다. 보유외환의 자산 구성을 떠벌리는 나라는 없다. 우리 경제의 위상에 걸맞은 외환 당국자들의 세련미가 아쉽다. 달러약세화가 대세라면 달러당 900원대, 800원대 등 '세자리 환율'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체질 개선과 국가적 대응전략이 더 급하다.

변상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