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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 뭡니까, 이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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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 방송국의 개그 프로 중 '블랑카의 뭡니까, 이게'라는 코너가 있다.

블랑카라는 외국인 노동자 역의 개그맨이 나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내용이다. 어눌한 말투 속에 담긴 구태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인기의 비결인 듯하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 등에는 이 코너를 빗댄 풍자가 등장했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혁신사업도 "뭡니까, 이게"라는 패러디의 대상이 됐다.

"기존의 것을 확 바꾸자"는 구호로 시작된 혁신 사업을 향해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지적과 함께.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야심 차게 사업을 독려하고 있는 관리들의 입장에선 이들의 생뚱맞은 반발은 고약하기 짝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혁신의 '혁'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는 공무원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현 정부의 혁신 사업 곳곳에 그만큼 허점이 있는 것이다.

우선 혁신이란 구호의 정치성과 허구성이다.

'고객과 성과 중심'이란 거창한 패러다임만 있지 구체적인 지향점과 실천 방향은 없다.

정부의 고객인 국민을 위해 뭘 하겠다는 것은 없고, 성과 내기에 급급한 생색용 이벤트만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행정부처 과장급으로 있는 한 4급 공무원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올해부터 매달 두번씩 '혁신 동아리'활동을 하고 있다. 다른 동료들보다 혁신 성적이 뒤처져 있어 자칫 승진에 불이익을 볼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동아리 활동은 한 시간 남짓 잡담을 나누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 공무원은 "겉치레에 불과한 행사 실적을 계량화한 뒤 이를 토대로 인사상 우대를 하겠다는 것은 전혀 혁신스럽지 못하다"고 꼬집었다.

혁신 점수를 따기 위해 공무원들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도 궁색하기만 하다.

'사무실 캐비닛 없애기''어두컴컴한 사무실 개선' '쾌적하고 밝은 사무실 조성''종이컵 없애기''간부용 엘리베이터 없애기' 등이 그것이다.

정부의 한 부처는 최근 직원들을 모아놓고 "그동안의 혁신 성과를 보여주자"는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회의시간을 줄이자"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혁신의 내용은 없었다.

"국민이 아쉬워하는 점은 이러이러한 것이고, 이를 고치기 위해 우리 공무원들이 정부 조직과 행정을 이런 방향으로 개선하자"는 소리를 들은 적이 거의 없다. "이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 정부는 혁신사업 추진 지침을 통해 "혁신체계 구축으로 혁신의 체질화를 이루고 혁신성과를 체감할 수 있는 혁신 문화를 창달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위한 세부지침으로 '혁신교육, 학습의 총괄 지정 및 운영''혁신교육 T/F 회의 구성 및 운영'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선 공허하고 현란한 말잔치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공무원은 "무늬만 혁신이지 과거 정부와 다를 것이 없다"는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과거 정부 때의 공직사회 변화 운동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현 정부는 혁신사업을 위해 48곳의 중앙행정기관과 16개 시.도, 234개 기초자치단체에 혁신담당관을 임명하고 올해만도 230억원의 예산을 지원키로 했다. 그러나 국민은 혁신의 성과를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혁신사업을 혁신답게 하기 위해선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뭡니까, 이게. 혁신 나빠요"라는 조롱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박재현 사건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