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따뜻한 보수, 열린 보수여야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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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플로리다주엔 가격폭리처벌법이 있다. 이 법 적용이 적절한가, 뜨거운 논쟁이 붙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공정가격이란 없다. 가격이란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매겨질 뿐, 수요가 많아지고 가격이 오르면 생산이 늘고 산업이 더 커진다. 간단한 시장논리로 폭리처벌법 폐지론이 나온다. 그러나 남의 불행을 틈타 폭리를 취하는 탐욕에 대한 징계 없이 어떻게 사회정의가 바로 설 수 있는가.(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마트 피자’ 논쟁이 트위터에서 활발하다. 이마트가 시중 피자보다 크기는 크면서 값은 싼 즉석피자를 팔아 폭발적 매출을 올렸다. 네티즌이 이는 중소 피자 가게의 몰락을 초래한다고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을 향해 비판을 날렸다. 정 부회장은 “소비를 이념으로 하나? 많은 사람들이 재래시장을 이용하면 그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어차피 고객의 선택이다”고 답했다. 시장경제 논리와 약자보호 정의론이 맞선다. 누가 옳은가.

기업형 수퍼마켓(SSM)의 상권을 제한하는 관련법이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대기업 수퍼마켓이 골목상권을 싹쓸이하면 소상인들은 갈 곳이 없다. 이들을 보호한다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다. 그러나 더 싸고 더 편리한 시설은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다. 왜 진입 규제를 하는가. 친서민이라고 여야가 앞다퉈 이런 규제법을 만들면 세계무역기구(WTO)가 제소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글로벌 공정 경쟁과 친서민 온정주의가 충돌한다.

돈이 없어 학교에 못 가고 병원 치료를 못 받는 사회는 나쁜 사회다. 그러나 교육 기회의 균등이 평준화 정책을 낳고 공교육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하향평준화 결과를 몰고 왔다. 지난 진보 정권 10년간 의료보험체계는 선진화되었지만 의료 경쟁력을 담보할 병원 영리법인화 계획은 평등주의에 발 묶여 한 치도 못 나가고 있다. 평등과 경쟁은 영원한 적대관계인가.

무상급식이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 최대의 성공 브랜드였다. 모든 학생이 공짜 점심을 먹는 공정 사회, 공정 점심이 나쁠 게 없다. 다만 현실적이지 않다. 추워도 난방조차 못해 발 동동거리는 낙후된 학교시설은 두고 돈 있는 집 아이 점심까지 공짜로 먹인다? 그보다는 결식아동의 방과 후, 방학 중 끼니를 걱정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키나.

개천에 용 나는 기회의 통로가 ‘고시’였다. 사법·행정·외무 고시를 위해 면벽(面壁) 몇 년에 해당 과목 달달 외며 세상과 담쌓고 수도승처럼 공부를 한다. 여기에 다양한 정보를 갖춘 글로벌 인력을 키우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해서 법률전문대학원이 나오고, 외교 아카데미가 등장했으며, 5급 공무원 특채가 확대됐다. 그러나 외교장관 딸 특채가 문제되면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모양이다. 고시는 공정 사회의 등용문이고 비고시는 부정 사회의 인사제도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서민 희망 예산’ 3조7000억원을 들여 무상보육 확대, 전문계 학생에 교육비 무상지원, 다문화가정 끌어안기라는 정부 수립 이래 전례 없는 화끈한 친서민 복지정책을 발표했다. 성장보다는 분배, 보수보다는 진보 정당의 정책에 가깝다. 보육정책 부재가 망국의 세계 최저 출산율을 초래했다면 성장·분배 가릴 거 없이 이것이 국가 최우선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전문계 학생 교육비 무상 제공은 직업교육 강화로 이어져 TV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처럼 행복한 빵 만들기에 인생을 거는 아름다운 마이스터 교육 풍토를 조성할 수 있다.

공정과 불공정의 잣대 하나만으로 세상을 재기엔 우리 사회가 너무 복합적이고 다원화됐다. 플로리다 경우에서, 이마트 피자에서 시장경제와 정의 규범이 충돌을 하고, 골목상권 보호에서 글로벌 경쟁과 친서민 온정주의가 마찰을 한다. 평등을 따르니 교육 경쟁력이 죽고, 경쟁력만 강화하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정글이 된다. 무상급식에서 이상과 현실이 맞서고 인재등용에도 하나의 방식만은 없다.

공정과 불공정, 정의와 불의도 헷갈리지만 보수와 진보의 정책도 이젠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다. 따뜻한 보수, 열린 보수여야 복합 다원화된 이 사회를 끌고 갈 수 있다. 문제를 이념과 주의로 풀지 않고 현실에 맞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답을 찾는 방식, 그것이 바로 실용주의 노선 아니었던가.

권영빈 경기문화재단 대표·전 중앙일보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