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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만행 증언하는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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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호 19면

사적 제324호인 서대문형무소 옥사(獄舍). 1987년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로 옮겨가기 전까지만 해도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으나, 현재는 옥사 7개 동, 사형장, 보안과 청사만 남았다. 신동연 기자

인왕산 서쪽 자락 독립문역 사거리, 서울역에서 구파발 가는 의주로 왼쪽에 독립공원이 있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건축물이 독립문이다. 남동쪽 상단에는 ‘독립문’ 현판 글씨를 한글로 새겼고, 북서쪽 상단에는 한자로 새겼다. 좌우에는 네 개의 괘 위치가 상하로 뒤바뀐 태극기 문양이,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李花: 자두 꽃) 문장이 방패 모양으로 박혔다. 나폴레옹이 세운 파리 개선문을 본떠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Sabatin)이 설계했다. 전쟁영웅들이 개선식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는 장식문은 고대 로마의 유습이다. 근대에 국가주의가 일어나면서 유럽 도시에는 이런 독립된 형태의 문들이 유행했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45>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했다가 돌아온 개화파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이른바 친러·친미 성향의 정동파를 부추겨 독립협회를 창립한다. 안경수가 회장을 맡고 이완용이 위원장이 된다. 독립협회의 첫 사업이 바로 독립문을 세우는 일이었다.

김자동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왼쪽)과 서예가 김선원씨가 독립문 앞에서 동농 김가진이 쓴 편액의 ‘門’자와 독립문의 ‘門’자를 비교해 설명하고 있다. 신동연 기자

독립문 바로 앞에는 두 개의 석주(石柱)가 어색하게 서 있다. 중국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迎恩門) 기둥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줄곧 중국을 사대(事大)해 왔고 이 문으로 드나들던 중국 사신들은 그야말로 ‘칙사(勅使) 대접’을 받아왔다. 그런데 1895년 2월 청일전쟁 막바지에 이 영은문은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 물론 총독 같은 위세를 떨쳤던 위안스카이(袁世凱)도 도망치듯 조선을 떠난 뒤였고 청나라의 힘은 더 이상 조선에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는 고종이 스스로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중이어서 조선은 러시아 천하나 다름없었다. 이런 정국에서 굳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자축하는 기념물을 세웠던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고종을 등에 업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던 러시아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더 절박했던 게 아닐까.

독립문은 청나라로부터 독립 자축하는 기념물
문(門)은 경계를 넘어가는 구조물이다. 인간사 길흉화복이 드나드는 길목이자 시대정신의 표상이기도 하다. 독립문을 통과하면 번쩍 치켜든 오른손에 ‘독립신문’을 들고 선 서재필 동상이 보인다. 1890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시민권을 취득하고 양의사가 된 그의 영어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서재필을 거꾸로 읽을 때의 발음과 같다. 그가 국민의 대변지를 기치로 창간한 ‘독립신문’은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계몽에 큰 역할을 한 기념비적인 신문이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의 탄압을 받고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추방되고 만다. 갑신정변 때 좌절된 꿈이 또 한 번 꺾여버린 것이다. 체제가 지닌 한계를 몇몇 개인의 힘으로 극복하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다.

순국선열들의 위패가 봉안된 독립관과 3·1독립선언기념탑을 지난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현장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출입문으로 들어서는 발길이 착잡하다. 100년이 넘은 오래된 감옥의 문턱에서 미셸 푸코를 떠올린다. 그가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에서 말한 것처럼 감옥은 권력 유지의 도구다. 감옥은 곧 처벌을 위한 건축물이다. 처벌이란 범죄에 대한 정당한 형벌이다. 제국주의에 희생된 식민지 백성의 독립운동이 범죄가 되는가. 인류가 광기와 망령에 사로잡혔던 시절에 일제는 한반도를 강제 점령했다. 그때 정당한 형벌이라는 게 성립될 수 있었던가. 불행한 역사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그릇된 폭력 행사를 우선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강자의 이해타산이 가치판단 기준이었음은 물론이다.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소로 문을 연 이곳에 붙잡혀온 독립지사들이 3·1운동 때만도 자그마치 3000명이나 된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4만여 명이 구속 수감되었고 그 가운데 400여 명이 처형 혹은 옥사 등으로 순국했다. 그들은 무죄이며 역사는 위인으로 기린다. 그렇다면 감옥은 허상이 아니겠는가. 인간을 교화시키는 규율이 도리어 자유를 구속하는 비극적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곳을 찾는 이들 가운데 5%가량이 일본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한국인들에게 자행한 만행의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합니다. 이곳은 한·일 양국 국민들의 공동 역사 교육장이지요.”

‘유관순 굴’이라고도 불리는 지하감옥, 0.7평 독방, 고문실로 안내한 서대문구 도시관리공단 김태동(32)씨가 벽관(壁棺) 앞에서 말했다. 벽관은 산 사람을 시체처럼 관 속에 구겨 넣고 꼼짝도 못하게 세워두는 고문 기구다.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를 붙잡고 울었다는 사형수들. 하늘이 준 생명을 제국의 이름으로 처형했다. 해방이 되고 1992년에 독립공원으로 탈바꿈했지만 그 이전인 1987년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로 옮겨가기 전까지 감옥과 사형장의 기능은 존속됐다. 대한민국 헌법은 사형 제도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 정치깡패 이정재, 육영수 저격범 문세광, 위장 귀순간첩 이수근, 인혁당 관련 인사 8명,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 김재규, 강력범 김대두 등이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형장 교도관들은 정당한 집행이라고 자기최면을 걸었겠지만 대개 살인의 악몽에 시달려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사직서를 내고 잠적하는 예도 많았다고 한다.

독립문 현판 글씨 주인공 여전히 논란
우리나라는 지난 13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국제관례나 세계조례에 따라서 사실상 사형제도 폐지 국가로 인정된 나라다. 국가공권력이라도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감옥의 환경 개선도 자주 거론된다. 지난 4월 문을 연 노르웨이의 할덴 감옥은 호텔 뺨치는 럭셔리한 시설로 재소자들을 최대한 편안하게 배려하고 있다.

근대의 현장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우리는 참으로 과거의 유산을 지워버리기에 바쁘다. 운동 나온 재소자들끼리 소통을 못하게끔 만든 부채꼴 모양의 격벽장, 공장 등을 헐어버리고 녹지나 주차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지하감옥은 원형을 지워버리고 일본풍 건물로 바꿨다. 게다가 서대문형무소 100년사 한 권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2008년을 넘겨버렸다. 흔히 역사청산을 말하곤 하는데 역사는 진솔한 기록으로 복원해야 할 대상이지 청산 대상이 아니다.

다시 독립문 앞에 선다. 영은문 표석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표석에 기록된 영(迎)자가 거슬린다. 책받침(<8FB6>)을 제외한 글자가 ‘나 앙(<536C>)’이 아닌 ‘토끼 묘(卯)’로 돼 있다. 바로잡아 다시 세워야 마땅하다.

이제 말도 많은 독립문 현판 글씨에 얽힌 불편한 진실 찾기에 나설 때다. 독립문 현판 글씨를 쓴 이는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으로 알려져 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 기사 내용이다. 이 기록이 유일한 사료다. 이완용의 자서전 일당기사(一堂紀事)를 보면 66세 되던 해 1월 11일, 직지사에 2개의 편액을 써서 내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1898년 그의 나이 만 40세 때의 행적에서 그가 독립문 현판 글씨를 썼다는 기록은 없다.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동농 김가진·1846~1922)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1991)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김자동(82)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조부의 서첩을 펼쳐 보이며 정색으로 말했다. 독립운동가 정정화 여사는 밀정을 피해 독립자금을 치마 속에 숨기고 압록강을 건너다니며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했다.

“서예 전문가나 정통한 감정가라면 한눈에 알 수 있는 문젭니다. 52세의 농익은 동농 글씨가 분명해요. 동농 선생은 송나라 때 명필 미불(米<82BE>) 글씨를 즐겨 쓰셨어요.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길게 보여서 중후하고 넉넉하지요. 이완용은 당나라 안진경체를 즐겨 썼는데 이완용 글씨는 세로로 길고 옹색한 맛이 있습니다. 글씨에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요.”

감정 권위자인 서예가 김선원(65)씨는 ‘문문(門)자’와 ‘설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단언했다.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함원전(含元殿)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전혀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이완용 평전을 쓴 전 언론인 윤덕한(65)씨는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한다.

“100% 이완용 글씨입니다. 정동파가 중심이 돼 창립한 독립협회지요. 외부대신 이완용은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이 되어 독립문 건립을 주도했어요. 김가진도 발기인이긴 했지만 그는 친일파였어요. 정동파가 주도한 사업에 현판 글씨를 쓰겠다고 나설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간 부끄러운 역사를 덮어두려고만 했다. 하루 평균 1만 명 가까이 찾는 역사의 산 교육장 독립공원의 상징인 독립문 현판 글씨 주인공을 확실히 가릴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김가진이 아닌 이완용의 글씨라면 안내 책자에 당당하게 밝히고 여론을 수렴해 사후 대책을 모색해야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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