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195> 도입 20년 민사조정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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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누구나 평화롭게 지내고 싶지만, 살다 보면 서로 다투게 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받지 못해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깊은 밤에 쿵쿵 뛰어다니는 아파트 위층 이웃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지요. 사소한 문제로 싸우다가 “법대로 하자!”며 소송으로 번지는 일도 요즘은 드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110만 명 이상이 민사소송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일본과 비교했을 때 인구 1만 명당 6배라고 하네요. 그러나 재판은 당사자 입장에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리고 소송을 진행하는 데 국가의 세금도 많이 들어갑니다. 마땅한 대안이 없을까 고민하는 독자 여러분께 민사조정제도를 소개합니다. 1990년 민사조정법에 따라 이 제도가 도입된 지도 올해로 20년이 됐습니다.

구희령 기자

지난달 30일 서울중앙지법 동관 1555-2호 서울법원조정센터 조정실에서 조홍준 상임조정위원이 손해배상 사건을 조정하고 있다. 1990년 민사조정제도가 도입된 이래 실제 조정 장면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서울법원조정센터 제공]

조정(調停·mediation)은 당사자들 사이에 제3자가 개입해서 양쪽을 설득하고 양보하도록 유도해 합의를 하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양쪽이 합의해 조정이 이루어지면 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것과 똑같은 효력이 있습니다.

비슷한 방법으로 중재가 있는데요, 둘 사이의 차이점이 궁금하시죠. 중재의 경우 당사자들이 합의해서 관련 분야의 전문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갖춘 중재인을 정한 뒤에는 중재인의 결정에 따라야만 합니다.

조정은 좀 다릅니다. 조정인이 권고를 할 순 있지만 이에 따를지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당사자들의 몫입니다.

어느 한쪽만 동의해서는 조정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물론 ‘강제 조정’이라고 조정인이 임의로 권고안을 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답니다. 한마디로 조정을 하면 선택의 폭이 좀 더 넓어지는 것이지요. 조정이 실패로 끝나면 정식 소송절차로 넘어갑니다.


일반 소송보다 시간도 절약

조정을 하면 소송을 하는 것보다 뭐가 좋을까요. 우선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답니다. 소송을 낼 때는 법원에 인지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소송 액수가 클수록 인지값도 비싸지요. 그런데 조정 신청을 하면 소장에 붙이는 인지값이 정식으로 소송을 제기할 때의 5분의 1이랍니다. 예를 들어 홍길동씨가 손해배상 소송을 냈을 때 인지값이 50만원이라면, 똑같은 사건을 소송 대신 조정으로 신청하면 10만원만 내면 되는 것이죠. 재판을 하고 싶다고 소송을 낸 경우에도 재판부가 권해 판결 대신 조정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때는 인지값의 절반을 돌려줍니다. 만약 홍길동씨가 소송을 신청했다가 조정으로 끝나면 인지값이 25만원 드는 것이죠. 처음부터 조정을 신청했다면 10만원만 내면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조정이 실패해서 소송절차로 넘어갈 경우엔 어떻게 될까요. 홍길동씨가 처음부터 소송을 제기했을 때보다 10만원이 더 드는 걸까요. 아닙니다. 조정 인지값을 뺀 나머지 40만원만 더 내면 된답니다.

시간도 많이 절약됩니다. 대개 1심 판결이 나올 때까지 6개월 내지 1년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조정은 신청부터 결정까지 3~4개월이면 충분합니다. 단 한 번의 조정으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신청부터 사건 배당, 조정 성립까지 한 달이면 끝나기도 합니다.

딱딱한 법정 대신 조정실에서 좀 더 편안한 분위기로 당사자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울면서 화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네요. 재판은 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조정은 대부분 당사자와 사건 관계자만 참석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울법원조정센터 조홍준 상임조정위원은 “조정은 양쪽 당사자의 대결이나 승패 구조가 아니라 서로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우선한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합니다.

재판에선 증거가 우선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재판에서 질 수 있습니다. 조정은 법리보다도 당사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묘안을 도출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오랜 소송 끝에 어느 한쪽이 1000만원의 손실을 부담하는 대신, 사이 좋게 500만원씩 나눠 부담하기로 합의하는 식이지요. 목사님들 사이의 조정 결정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 같은 문구를 넣은 적도 있다고 하네요.

조정은 또 재판보다 절차가 간소해 세금이 적게 들고, 판사들이 조정으로 부담을 던 만큼 보다 복잡한 고난도 사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답니다.

지난해 서울·부산에 법원조정센터 생겨

조정은 법원이나 법원조정센터에 서면 또는 구술로 신청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처음부터 조정을 신청하는 경우보다는 소송을 제기한 이후에 재판부의 권고에 따라 조정 사건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해 조정 사건 약 5만9000건 중에서 처음부터 조정을 신청한 경우는 1만1400건으로 19.4%에 불과합니다. 5건 중 4건이 일단 법원에 소송으로 접수됐다가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조정절차를 밟게 된 것이지요.

지난해 2월 민사조정법이 개정되면서 상임조정위원 제도가 도입됐습니다. 판사·검사·변호사 등 15년 이상 경력의 법조인들이 상근하면서 조정 업무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지난해 4월 서울법원조정센터와 부산법원조정센터가 문을 열었는데요, 서울은 박준서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8명의 상임조정위원이, 부산에는 조무제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3명의 상임조정위원이 각기 서울고법·서울중앙지법과 부산고법·부산지법의 조정 사건을 처리합니다. 센터는 서울중앙지법·부산지법 청사 안에 있습니다. 상임조정위원이 조정 사건을 처리할 경우 사건의 판결을 맡은 재판장이 직접 조정할 때보다는 아무래도 당사자들의 부담이 적겠지요.

출범 이후 서울법원조정센터는 지난 7월까지 4000여 건을 접수해 3700건을 처리했고, 부산법원조정센터는 1400건을 접수해 1200건을 처리했습니다. 각 93.06%, 85.9%로 사건 처리율이 높습니다. 하지만 소송을 제기한 해당 재판부가 조정을 하는 경우가 96.2%로 아직까지는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지난 3월부터 조기조정제도를 시범 운영 중입니다. 소송이 제기된 사건을 재판부에 배당하기 전에 조정이 더 적합한 사건을 골라내 서울법원조정센터 등에 맡기는 것이지요. 시행 이후 월평균 조정 사건 수가 5배 이상 증가했다고 합니다. 사건 해결률도 40%에 이른다는군요.

서울중앙지법은 올해부터 외부 기관과 연계해 조정하는 실험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에는 대한상사중재원과, 6월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와 업무협약을 맺고 각 151건과 172건의 조정을 배당했답니다. 법원이 외부 기관과 연계해 조정제도를 시행하는 것은 사법 사상 처음입니다.

생활과 밀접한 조정 사례 이런 게 있죠

원칙적으로 항소심 판결이 나기 전까지 모든 민사 사건에 대해 조정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 분쟁 금액이 적거나 비교적 간단한 사건이 조정에 적합하답니다. 2000만~5000만원 규모의 사건이 조기 조정에 가장 많이 회부되고요, 사건 내용별로 보면 임대차보증금 반환 사건이 조정으로 해결되는 비율이 65.4%로 가장 높았습니다. 조정 사건은 정말 유형이 다양한데요, 생활과 밀접한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인터넷 사기 피해=지난 1월 정모(45)씨는 인터넷을 통해 고가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구입했다. 그런데 판매자 A가 알려준 계좌로 1500만원을 입금한 뒤에도 프로그램이 배송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계좌 주인 송모(27)씨는 판매자 A와 다른 사람이었다. 송씨 역시 인터넷 거래를 통해 A에게 1500만원 상당의 시계를 팔았다고 했다. 송씨는 자신의 계좌로 정씨가 보낸 돈이 입금되자 A에게 시계를 보낸 것이다. 두 사람에게서 모두 3000만원의 금품을 가로챈 A는 행방이 묘연했다. 재판을 하면 둘 중 한 명은 1500만원의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두 번의 조정 기일을 거쳐 서로 750만원씩을 부담하기로 합의했다.

◆농구하다 다친 회사원=은행원 문모(30)씨는 지난해 직장인 농구대회에서 오른쪽 눈을 찔리는 부상을 입었다. 5개월 동안 치료했지만 시력이 떨어지는 등 후유증이 남았다. 하지만 부상을 입힌 상대방은 “농구하다가 다칠 수도 있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문씨는 병원비에 결근 손해까지 1000만원을 물어내라고 주장했다. 한편 상대방도 문씨가 지나친 요구를 한다며 격앙했다. 두 사람은 사고 이후 7개월 동안 서로를 비난하며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그런데 지난 5월 첫 조정 기일에 서로의 입장을 나누면서 그 자리에서 화해했다. 문씨는 “치료비는 150만원 정도 들었다”며 350만원을 받았다.

◆‘일렬 주차’ 차 밀다 부상=주부 김모(43)씨는 경기도 분당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를 빼기 위해 이중으로 일렬 주차해놓은 다른 차를 밀다가 차가 경사면에서 미끄러지면서 다쳤다. 김씨가 가입한 보험회사가 아파트관리회사를 상대로 1억2000만원을 청구했다. 1심은 관리회사에 3600만원의 배상 책임을 물었다. 그러자 양쪽이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다. 항소심 과정에서 재판부가 조정을 권했다. 조정을 진행하면서 보험회사가 “요즘은 이중 주차가 불가피한데 아파트를 지을 당시엔 예측하기 어려웠던 일”이라는 관리회사 쪽 입장을 받아들였다. 양쪽은 3000만원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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