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옛 수학책 『손자산경(孫子算經)』이 전하는 경 이상의 큰 수 단위는 불교의 영향이 컸다. 10의 52제곱을 뜻하는 항하사(恒河沙)는 인도 갠지스강의 모래 숫자처럼 셀 수 없이 많다는 비유다. 그 옛날 이런 수를 셀 일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단지 인간이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무궁한 우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수가 무한함을 깨우치려는 의도일 터다.
경은 구체적으로 사물을 헤아리는 데 사용되긴 하지만 그 크기를 짐작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주 이론에서 은하의 생성을 설명하는 거대한 고리 모양의 ‘우주 끈’이 등장하는데, 그 끈의 단위 길이당 질량이 1경톤이다. 인간이 수정된 난세포에서부터 80~90세까지 살면서 몸에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세포의 수가 1경 개라고 한다. 지구에서 개체수가 가장 많다는 개미의 수가 약 1경 마리다. 1경원을 1만원짜리로 땅바닥에 깐다면 우리나라를 474번 덮는다고 하니 그 양을 알 듯 모를 듯하다.
우리나라의 금융자산이 사상 처음으로 1경원을 돌파했다고 한다. 개인과 기업, 금융회사, 정부가 가진 금융자산을 모두 더하면 1경3조6000억원에 이른다는 게 한국은행의 그제 발표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9.4배 규모다. 이미 인터넷 뱅킹의 연간 거래 금액이나 파생상품 거래액도 1경원을 넘었단다. 한마디로 돈이 많다는 얘기다.
돈이 넘쳐 모두가 잘살면 그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마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1경원의 금융자산이 서민·중소기업과는 거리가 먼 딴 나라 얘기일 성싶다. 그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여전히 차디차다. 월급쟁이 살림살이 걱정은 여전하고, 식당 주인은 “상추 좀 더 달라”는 손님 말에 벌벌 떤다. 그림도 잘 안 그려지는 1경원 운운(云云)하는 세상, 모두가 함께 행복해질 수는 없는 걸까.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