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사설

남한 사회 정착 못해 떠나는 탈북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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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 국적을 취득한 탈북자(脫北者)들의 제3국 ‘위장망명’이 외교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는 소식이다(본지 9월 15일자 1면). 외교통상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4년 이후 영국에서 망명을 신청한 탈북자가 1000여 명이고, 그중 약 70%가 한국 국적 소지자라고 한다. 영국 정부가 이들에 대한 송환 대책 마련을 한국에 요구하면서 외교 문제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위장망명으로 확인된 탈북자 20명이 노르웨이에서 강제 추방된 사례도 있다.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 한국 국적 탈북자가 영국과 노르웨이 두 나라에서만 약 600명에 이른다는 것이 외교부 추산이다. 남한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제3국으로 도피하는 새터민들이 그만큼 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 들어오는 탈북자는 매년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에만 약 3000명이 입국했다. 통일부는 한국 국적을 취득한 탈북자 수가 이달 중 2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미국·캐나다 등 북미 국가나 영국·프랑스·네덜란드·노르웨이·스웨덴 등 유럽 국가, 또 호주·뉴질랜드 등 대양주 국가로 떠나고 있다. 한국 국적을 숨긴 채 현지에서 망명을 신청하거나 불법 체류를 하면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탈북자 2만 명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정착에 필요한 주거·취업·교육·의료 혜택 등 각종 지원에도 불구하고 탈북자들이 한국을 등지고 떠나는 것은 남한 사회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15세 이상의 탈북자 취업률이 44.9%에 그치고 있고, 그것도 일용근로자 등 단순노무직이 절반에 가까우며 기초생활수급자가 전체의 60.2%에 이른다는 통계는 이들의 힘든 현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더 큰 고통은 탈북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다. 많은 탈북자들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이주(移住) 노동자들보다 못한 ‘3등 시민’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 “같은 동포보다는 차라리 외국인에게 차별받는 게 낫다”며 제3국행을 결심한 탈북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일부에선 제3국행 탈북자들을 국민 혈세로 각종 혜택은 혜택대로 누리고 나서 훌쩍 떠나는 몰염치꾼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러나 그들을 탓하기 전에 과연 우리 사회가 그들을 따뜻한 혈육의 정으로 보듬는 노력을 했는지부터 겸허하게 반성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물론 새터민들도 탈북 과정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견뎌낸 그 의지와 각오로 남한 사회에 정착하고 동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제3국행이 확인된 탈북자에 대해서는 지원 혜택이 자동으로 중단되기 때문에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는 탈북자들도 많다. 우선 이들부터 한시적으로라도 제재를 유예해줌으로써 자진 귀국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애써 받아들인 탈북자들을 잃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남북한 양쪽의 경험을 갖고 있는 탈북자들은 통일 시대에 남북 통합과 화합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들을 잘 감싸 안아 장차 통일의 역군으로 육성한다는 쪽으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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