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역임’은 과거 직위에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15면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를 역임하고 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체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시의원을 역임하고 있다” “이 지역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있다” 등이 이런 예다.

‘역임’을 ‘힘써 맡고 있다’는 뜻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역임’의 한자는 ‘歷任’이다. 즉 지낼 력(歷), 맡길 임(任)으로 여러 직위를 두루 거쳐 지냄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의원을 역임하고 있다” 등은 성립하지 않는다. 현재 사실이므로 그냥 ‘맡고 있다’고 해야 한다. ‘역임’은 과거에 맡았던 두 개 이상의 직위를 나열할 때만 쓸 수 있다.

“정부 요직을 역임했다” “주요 관직을 역임한 매우 청렴한 분이다”에서는 ‘정부 요직’과 ‘주요 관직’이 과거에 지냈던 복수의 자리를 의미하므로 ‘역임했다’가 성립한다. “신문사 편집국장·주필 등을 역임하셨다”는 과거에 맡았던 둘 이상의 자리를 나열하고 있으므로 ‘역임했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한자어도 우리말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역임’에서 보듯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사용하는 예가 적지 않다.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말로 바꿔 쓴다면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역임’의 순화어는 ‘거침’ ‘지냄’이다. ‘역임했다’는 ‘거쳤다’ ‘지냈다’ 등으로 적절히 바꿔 쓰면 된다.

배상복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