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인 92% "미군은 점령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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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라크인 가운데 미군을 해방자로 여기는 사람은 2%밖에 되지 않는 반면 92%는 점령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군은 지난 1년간 매달 1000~3000명의 이라크 저항세력을 체포 또는 사살했으나 같은 기간 중 저항세력의 규모는 5000명에서 2만명 선으로 늘었다.

▶ 이라크 남성이 25일 바스라의 한 거리를 지나고 있다. 그 위로 30일의 이라크 총선 투표를 독려하는 게시판이 보인다. "재건과 파괴는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파괴를 위해 무기를 들지 말고 재건을 위해 손을 들라."[바스라 AP=연합]

이 같은 사실은 미국 워싱턴의 브루킹스 연구소가 25일 개최한 이라크 전략 세미나에서 마티 미헌 하원의원(민주. 매사추세츠)이 공개한 이라크 보고서에서 드러났다.

이에 따르면 미군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민심 이반'현상이다. 20만명으로 추산되는 이라크 협조자는 저항세력에 직.간접적으로 무기.물자.은신처.미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보고서는 "저항세력이 미군보다 나은 정보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라크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미군의 점령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다. 2003년 11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라크인 11%가 미군이 철수할 경우 자신들이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6개월 뒤에는 55%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당초 미군은 자신들이 외부에서 잠입한 테러리스트나 사담 후세인 잔당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현재 미군은 외세에 맞서는 이라크 토착 저항세력과 전투를 치르고 있다.

특히 30~40%에 이르는 이라크의 실업률은 미군에 불리한 요소다. 젊은이 대부분이 할 일이 없는 '백수'상태라는 뜻이다. 일자리를 찾아 길거리를 헤매다가 저항세력에 하나둘씩 참여하고 있다. 15만명에 이르는 이라크 주둔 미군은 지난해 연말 저항세력의 근거지인 남부 팔루자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저항세력의 규모는 더욱 빠르게 증가했다. 참고로 500만명에 이르는 이라크 수니파 인구의 평균 연령은 19세밖에 안 된다.

또 미군에 의해 해산된 이라크 군의 병력은 40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사담 후세인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4000여기의 견착식 미사일과 25만t의 폭발물을 갖고 있다. 이들은 현재 백수다.

미국은 이라크 문제에 세 가지 옵션을 갖고 있다. 첫째는 즉각적인 미군 철수다. 그러나 이는 채택할 수 없다. 엄청난 정치.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현 상황 유지다. 그러나 이 역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따름이다. 셋째는 단계적 철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이야드 알라위 이라크 임시정부 총리가 공동으로 시간표를 발표해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올해 말까지 대부분의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고, 나머지 소규모 기동부대는 2006년 여름까지 철수하는 방안이다.

미헌 의원은 단계적 철수 방안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부드러운 철수를 통해 이라크 내 정치역학을 변화시킴으로써 미국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정부의 체면도 세우면서 저항세력을 흩어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군이 스스로 장기 주둔을 포기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실추된 미국의 권위도 되찾을 수 있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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