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임기 반환점 이틀 만에 여권의 반란 시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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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04면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왼쪽에서 둘째)가 27일 국회 본청에서 열린 당 의원총회에서 김무성 원내대표(왼쪽에서 첫째) 등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안성식 기자

#장면1: 2001년 8월 20일 한나라당은 남북통일축전 방북단의 돌출행동에 책임을 물어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자 공동여당이었던 자민련이 동조하고 나섰다. 이완구 총무는 “해임건의안이 제출되면 당 의원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며 임 장관의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김종필 명예총재도 29일 청와대 만찬회동 제안을 거부한 뒤 “임 장관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결국 해임건의안은 9월 3일 가결됐고 DJP(김대중+김종필) 공조는 3년10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국회는 여소야대가 됐고 정국 주도권도 야당으로 넘어갔다.

김태호 총리 후보자 국회 인준 9월 1일로 연기

#장면2: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21일 청와대에서 비공개 오찬회동을 했다. 청와대는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의 하반기 국정 운영에 적극 협조하고 정권 재창출을 위해 같이 노력한다는 대화가 있었다”고 전했다. 여권 내에서는 이 대통령이 김태호 총리 후보자 등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박 전 대표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세종시 수정안이 박 전 대표의 반대로 무산된 전철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사전정지 작업에 나선 것이었다. 1시간35분간의 회동 후 박 전 대표가 밝은 표정으로 떠나자 청와대는 한시름을 놓았다.

#장면3: 27일 국회 본청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 당 지도부는 김 후보자 인준 방침을 확정하고 본회의에 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여니 ‘김태호 불가론’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친박 의원들은 침묵을 지켰지만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친이계 초선의원들이 들고나섰다. 심지어 “걸레 같은 행주로 식탁 닦으면…”이란 말까지 나왔지만 발언이 끝나자 의원들은 박수를 쳤다. 당 지도부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결국 임명동의안 처리를 다음 달 1일로 연기해야만 했다.

심재철·정태근 등 7명이 수도권 출신
정권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다. 야당의 공세는 오히려 정권 내부를 단단히 뭉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역대 정부에서의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임동원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 과정에서 보여지듯 정권 내부의 균열과 반란은 급속한 체제 이완을 불러오곤 했다. 김대중 정부도 2001년 9월 DJP 공조 파기 후 레임덕이 가속화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0년 8월엔 청와대의 방침에 여당 의원들이 반기를 들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지금의 문제는 청와대와 당의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에서 비롯됐다. 청와대는 대통령 임기가 2년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젠 뭔가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중압감을 받고 있다. 5년 단임제라는 속성상 목표를 위해서라면 굳이 국민 여론에 끌려갈 이유도 없다. 반면 당은 선거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더욱이 2012년에 치러지는 차기 총선은 대선보다 8개월 먼저 치러진다. 대통령 선거 승리보다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끄는 게 급선무인 셈이다. 2007년 대선 때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여당 의원들 입장에서 볼 때 총선에서 떨어지면 대선이고 뭐고 없다는 위기감이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27일 의총에서 ‘김태호 불가론’을 공개적으로 밝힌 의원 8명 중 심재철·정태근 의원 등 7명이 수도권에 지역구를 갖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민심의 기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수도권 출신 의원들로서는 자기가 먼저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정권 레임덕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상황이다.

서병수·나경원·정두언 최고위원도 가세
물론 청문회 전에도 언론의 각종 의혹 제기에 일부 비판 기류가 있긴 했다. 홍준표 최고위원도 “의혹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후보는 스스로 거취를 정하라”고 압박했다(본지 8월 22일자 6면). 그럼에도 임명동의안은 무난히 통과되지 않겠느냐는 견해가 대세였다. 하지만 청문회가 계속되면서 민심이 급속히 이반현상을 보이자 당 내부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특히 총리 청문회 이튿날 김 후보자의 거짓말이 잇따라 들통나면서 당내 기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이명박 정부가 반환점을 돈 지 이틀 만에 여권 내부의 반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여당 내부 기류가 계속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30~31일엔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가 예정돼 있다. 주말에 각자의 지역구에서 민심을 직접 접한 의원들이 모이는 자리다. 27일 의총에서 ‘걸레론’을 주장한 유정현 의원은 28일 “연찬회 때는 비판 여론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며 “지금 같아서는 연찬회에서 김 후보자를 옹호하는 의원이 나오면 거의 왕따 당할 분위기”라고 전했다.

당 지도부도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안상수 대표는 “국정의 연속성을 위해 총리 자리를 장기간 비워둘 수 없다”며 “민주당에서 말하는 이른바 ‘4+1’에 걸리는 것도 없는데 야당이 너무 정략적으로 정부 흔들기를 하고 있다”고 민주당에 화살을 돌렸다. 하지만 이날 본지와 통화한 다른 최고위원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한 최고위원은 “27일 의총 후 열린 최고위원회의 때 ‘김 후보자의 거짓말이 또 나오면 그땐 우리도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며 “그런데 곧바로 박연차 전 회장이랑 찍은 사진이 나오자 모두들 격앙했다”고 전했다.

친박계인 서병수 최고위원도 “한나라당이 시끄러운 게 아니라 김 후보자가 시끄럽게 살았다. 그런데 인준을 해주자니 당이 곤란해지고 안 하자니 대통령이 곤란해지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라며 말을 흐렸다. 나경원 최고위원도 “지도부 생각이 의원들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김무성 원내대표는 “할 말이 없다. 좀 더 두고 보자”며 말을 아꼈다. 지역구를 돌고 있던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자는 “의원들이 어제 내 방에 많이 찾아와 걱정들을 많이 했는데, 나도 청문회를 거친 사람으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면서도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매듭지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이계 반란 기류에 청와대는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당이 사안의 본질을 보려 하지 않고 야당의 정치공세에 휘말려 들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 고위 관계자는 “ 정운찬 총리 때와 비교해봐도 김 후보자에게 더 문제가 있다고 할 결정적 하자가 있느냐”며 “김 후보자가 지방 출신이어서 홀대받고 있다는 인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여론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김태호 “뭐라 말할 처지 아니다”
김 총리 후보자는 이날 개인 사무실로 쓰고 있는 서울 광화문 오피스텔 경희궁의 아침 3단지 301호에 머물렀다. 오후엔 부인 신옥임 여사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했다. 김민수 전 보좌관은 “총리 후보자가 별 말씀이 없으셨다. 지금 뭐라 말할 처지가 아니지 않느냐”며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금명간 입장을 밝힐 게 있느냐’고 묻자 “입장을 발표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느냐. 그냥 여론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청와대에서도 아무 연락 온 게 없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다음 달 1일 임명동의안이 표결에 부쳐질 경우 부결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고 보고 있다. 무기명 투표라는 속성상 찬성 당론을 정한다 하더라도 친이계가 반대표를 던질 경우 막을 방도가 마땅찮은 상황이다. 연찬회를 거치면서 분위기가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크다. ‘김 후보자의 자진사퇴만이 유일한 수습책’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통령과 청와대, 한나라당 지도부의 선택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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