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빚, GDP의 90%면 성장엔진 힘 잃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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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24면

국가 부채와 인플레이션, 경제 성장률이 요즘 최대 이슈다. 전쟁이 아닌 평화 시기에 요즘처럼 국가 부채가 많았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드문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탓에 수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 대부분은 추상적인 경제이론을 바탕으로 자기 주장을 내놓고 있다. 생생한 데이터를 분석해 주장을 내놓는 경우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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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44개 나라 데이터를 살펴봤다. 미국 등 선진 20개국과 이머징 국가 24개 나라가 조사 대상이었다. 조사 대상 나라들의 국가 부채와 인플레이션, 경제 성장률을 계량 경제학적으로 따져봤다. 분석기간은 최근 200년으로 했다. 데이터 개수만도 무려 3700개나 됐다. 나라별 정치 시스템의 차이도 감안했다.

국내총생산(GDP)과 견준 국가 부채 비율에 따라 44개 나라를 4개 그룹으로 나눴다. 0~30%, 31~60%, 61~89%, 90% 이상 순이었다. 요즘 우리는 국가 부채 비율이 100%를 넘는 나라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조사 대상 44개 나라의 부채 비율이 90%를 넘은 경우나 시기는 10%도 채 되지 않았다.

분석 결과 국가 부채 비율-실질 경제성장률의 관계는 일정하지 않았다. 국가의 부채 비율에 따라 성장률이 일정하게 낮아지거나 높아지는 현상은 찾을 수 없었다. 얼핏 보면 몇몇 전문가가 주장한 대로 국가의 부채 비율과 경제 성장률은 무관한 듯했다.
그러나 국가 부채 비율이 일정 선을 넘어서면 사정이 달라졌다. 그 선이 바로 GDP 대비 부채 비율 90%였다. 이 선을 넘어서면 평균 성장률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1% 이상 떨어졌다. 이런 현상은 선진국이나 이머징 국가 모두 마찬가지였다. 시대별로 차이가 있지도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나 이전, 심지어 19세기에도 비슷한 현상이 발견됐다.

그렇다고 국가 부채 비율 89%는 괜찮고 91%는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통계적으로 자동차 사고가 시속 70km를 넘어서면 높아진다고 해서 시속 69km는 안전하고, 71km는 위험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국가 부채 비율 90%는 요즘 같은 상황에선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금융위기는 정부의 재정상태를 나쁘게 만들기 마련이다. 막대한 자금이 금융 시스템을 유지하거나 살려내는 데 투입된다. 경기 부양에도 만만찮은 돈이 들어간다. 실물 경제가 둔화하거나 침체에 빠지면 세금도 제대로 걷히지 않는다. 우리가 분석해 보니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3년 뒤면 국가 부채 비율이 평균 86% 수준까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외적으로 한국과 말레이시아, 노르웨이 부채 비율은 위기 3년 뒤에도 86% 수준을 밑돌았다. 일본은 버블 붕괴 3년 뒤까지는 국가 부채 비율이 안정적이었지만 나중에 급격하게 높아졌다. 현재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 정부가 시간을 끌다가 재정을 쏟아부으며 공격적으로 경기부양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2007년에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고 말한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의 국가 부채 비율이 대공황 이후 일반적인 금융위기 때보다 더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선진국 평균 부채 비율이 위기 3년 뒤 평균치인 86% 수준을 넘어 성장률에 영향을 주는 90%도 돌파할 가능성이 커보인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부채 비율이 증가하면 정부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일 수밖에 없다. 아니면 긴축정책을 실시해 돈 씀씀이를 줄여야 한다. 사정이 다급하면 세금인상과 긴축정책을 써야 할 수도 있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쓰든 공공과 민간 부문의 투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투자가 줄면 경제 성장률이 낮아진다.

몇몇 전문가들은 미국은 예외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발행하기 때문에 부도를 낼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 그 근거다. 그럴 수 있다. 한 나라가 감당할 수 있는 부채 규모는 과거 신용도에 따라 다르다. 한 번도 부채 위기를 겪지 않은 나라는 비슷한 경제 규모인 다른 나라들보다 더 많은 부채를 견딜 수 있다.
이런 일반론을 요즘 미국에 적용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인들이 공격적으로 빚을 갚았지만 올해 3월 말 현재 민간과 공공부문의 부채 비율은 GDP의 350% 이상이다. 거품 시기 최고치인 370%보다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위험스러운 수준이다. 국가 부채 비율만도 GDP의 117%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정부의 부채 비율이 이토록 높았던 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119%)뿐이었다.

이머징 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은 외국에 지고 있는 채무(대외 채무)에 아주 민감했다. 이들 나라의 대외 채무는 거의 대부분 달러나 파운드 같은 외화 표시 채권이었다. 이머징 국가의 대외 채무가 GDP의 60%를 넘어서면 성장률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평균 2% 정도 낮아졌다. 대외 채무가 100% 정도를 넘어서면 성장률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절반 수준이었다.

국가 부채와 인플레이션 관계는 일반적인 경제상식과 거리가 좀 있어 보였다. 선진국에서는 국가 채무 비율이 높다고 해서 인플레이션이 높지는 않았다. 미국이 예외였다. 국가 부채비율이 높을 때 인플레이션이 높았다. 이머징 국가에서는 국가 부채 비율이 올라가면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는 현상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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