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남쪽 대화론자 입지 고려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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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은 원자로의 봉인 해제와 감시 카메라 훼손에 이어 또 사용후 핵연료봉 저장 시설의 봉인을 제거했다. 북한이 더 나아가 이 연료봉의 재처리 작업에 돌입한다면 사태는 한층 위험스럽게 된다.

이는 북한이 미국의 중유 공급 중단에 대응, 전력 생산을 위해 핵 동결을 해제한다는 주장의 최소한의 정당성마저 팽개치는 행위다. 사용후 핵연료봉 재처리는 바로 핵폭탄 제조와 연결되는 사안이다. 북한이 이 연료봉 8천개를 재처리할 경우 핵폭탄 3∼6개를 제조할 수 있다. '북핵 개발 프로그램' 주장이 미국의 '자의적 판단'이라고 반발했던 북한은 설 땅을 잃는다. 대신 북한이 몰래 핵을 개발하려 했다는 의혹의 심증만 굳어진다.

이는 북·미 간 제네바 합의 체제의 무력화를 뛰어넘어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까지 파기하는 가공할 사태로 빠져듦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유엔 안보리는 북핵 문제를 핵심 현안으로 올려 국제적인 제재 조처를 모색하게 돼 있다. 친북의 중국과 러시아도 북핵 개발엔 반대하고 있다. 북한은 고립무원이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미국에서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 한단계씩 끌어올리는 대미 압박전술이 사용후 핵연료봉의 재처리까지 나아갈지는 아직 모르지만 미국은 북한의 협박성 조처에 꿈쩍하지 않고 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이는 쪽은 한국, 그것도 북·미 간 중재역을 공언한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승계를 약속한 盧당선자가 취임 직전부터 서로 압박 전술을 구사하는 북·미 간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위기에 봉착해 있다. 북한에 상대적으로 이해심을 보이는 盧당선자가 취임해 북·미 간 절충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남북 협력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북은 바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려면 남쪽의 대북 화해론자들이 설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북한이 조성해야 한다. 북한이 핵 동결 해제를 원상회복해야 하는 또 다른 까닭이다. '민족공조'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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