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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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세기 중·후반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닥쳤다. 이른바 감자 대기근(Potato Famine)이다. 주식 작물이던 감자에 전염병이 돌아 흉년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여기에 콜레라까지 번져 당시 1백50만명 이상이 굶거나 병들어 죽었다.

그러나 당시 '해가 지지 않던' 이웃 영국은 이를 외면했다. 그런 영국인들에게 아일랜드인들은 한이 맺혔다. '아 목동아'로 잘 알려진 아일랜드 민요 '런던데리 에어'엔 이런 한이 배어난다. 아일랜드인들의 한은 북아일랜드 사태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독일인 중에는 뚱보가 많다. 막연한 선입견이 아니다. 2년 전 독일 통계청은 독일인 47%가 비만이라고 발표했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의 경우 남자 73%, 여자 59%가 비만으로 다른 연령층보다 훨씬 높았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절대빈곤 속에서 먹는 데 한이 맺힌 세대다. 1960∼70년대 '라인강의 기적'으로 좀 살만해진 이들은 우선 음식에 한풀이를 했다.

이처럼 외국에도 한(恨)이 있고, 또 한풀이가 있다. 그래도 아무려면 한이 유전인자에까지 밴 우리와 비교할 수 있을까. 피침과 수탈, 가난과 질곡의 수천년 역사 그 자체가 한이었다. 이어령 교수는 한을 '체념해 버린 분노, 체념해 버린 슬픔'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우리도 형편이 피면서 체념만 하지는 않았다. 요란하게 한풀이를 했다. 상다리가 휘어지는 푸짐한 상차림, 그래서 나오는 하루 1만2천t에 달하는 음식 쓰레기는 못 먹던 시절에 대한 한풀이다. 다이어트의 유행은 이 한풀이가 끝나간다는 방증이다. 몇년 전 옷로비 사건의 이면엔 '헐벗은' 시절의 한풀이가 있었고, 어떻게 해서라도 내집을 마련하겠다는 집 없던 시절의 한은 대한민국을 아파트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교통체증도 결국 자가용 한풀이가 끝나야 풀릴 것이다.

권력자들이 개인적 한풀이에 권력을 남용한 경우도 많았다. 수천억원씩 부정축재한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돈과 권력 그 자체에 한풀이를 했고, 이들을 구속한 김영삼 대통령은 군사정권에 보복 성격의 한풀이를 했다. 이 정권 들어서도 '미운 놈 골라 때리기'가 심했다. 특히 대통령 인척과 측근들의 게이트 시리즈는 과거 풍찬노숙(風餐露宿)하던 시절에 대한 한풀이 잔치 한마당이었다.

오늘 대통령에 당선되는 사람은 제발 '손볼 놈' 잊어버리고 이런 한풀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바란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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