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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4>제104화두더지인생...발굴40년:39.암사동 선사유적 발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무령왕릉 발굴로 다사다난했던 1971년 한 해를 보내는가 했는데 11월 들어 생각하지도 않은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 발굴에 참여하게 됐다.

암사동 선사유적은 워커힐 건너편의 한강변 충적 대지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선사공원으로 조성, 발굴 조사된 선사인들의 집터(住居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비해 놓았다. 또 전시관을 건립해 방문객들이 우리나라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해마다 여름이면 강동구에서 선사 체험장을 마련, 각종 이벤트를 준비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체험학습장 구실을 톡톡히 하는 것은 물론 서울의 문화유적 명소로도 자리를 잡았다.

암사동 유적이 처음 알려진 것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을 때인 1925년, 소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해 서울이 막대한 홍수 피해를 보고 나서였다. 홍수가 지나고 난 후 암사동 한강변 일대의 모래 퇴적층에 흩어져 있던 빗살무늬 토기(櫛文土器)편들이 채집됐다. 비로소 그 존재가 학계에 알려지게 됐지만 후속 발굴조사는 없었다.

광복을 맞았지만 역시 고고학적인 관심 대상이 되지 못했다. 단지 한강변의 선사유적으로 유일하게 빗살무늬 토기편들이 지상에서 채집된 유적이라는 정도만 보고됐을 뿐이다. 그러던 중 60년대 들어 서울의 장충 고등학교가 야구장을 만들기 위해 이 일대 부지를 사들여 대지 조성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빗살무늬 토기편들이 많이 출토됐고, 다시금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67년 한국 대학박물관협회의 주관으로 고려대학교·숭전대학교(현 숭실대학교)·경희대학교 등으로 구성된 대학박물관 연합 발굴팀이 만들어져 광복 후 처음으로 암사동 선사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연합 발굴이 갖는 한계 때문에 단 1회 조사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7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선사문화를 고고학적으로 구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암사동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계획을 마련했다. 1차연도 발굴조사가 71년 11월 시작됐는데 국립박물관 고고과(考古課)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이 함께 나섰다. 나는 조사원으로 참가하게 됐다.

당시 사무실이 있던 광화문에서 암사동 발굴현장까지 가기 위해서는 지금은 없어진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경기도 광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워커힐 앞쪽의 광장교(廣壯橋)를 건너가 천호동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야 했다. 천호동에서 현장까지는 다시 한강변 둑길을 따라 30∼40분을 걸어갔다.

지금은 일대에 아파트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는 등 번화가로 바뀌었지만 당시는 논밭뿐인 벌판이었다. 한강 다리도 지금은 20개가 넘지만 당시에는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다리가 제1한강교(지금의 한강대교)·제2한강교(양화대교)·제3한강교(한남대교)·광장교 등 4개뿐이었다.

당시 나는 신석기시대 집터, 즉 선사주거지(先史住居址) 발굴 경험이 전무했다. 한편으로는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슬며시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경험이 없기는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선사주거지 유적의 존재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칫 실수라도 했다가는 톡톡히 망신당할 판이었다.

늦가을이어서 날씨는 쌀쌀했지만 한낮의 햇볕은 꽤 따뜻했다. 바람만 불지 않으면 작업하기에는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으나 음식과 잠자리가 큰 문제였다.

집에서 현장까지 출퇴근하면서 조사하기는 불가능했다. 하루 이틀 정도면 새벽에 나와 시외버스를 타고 현장에 간다고 하겠지만 1개월 이상 지속될 발굴 기간 내내 출퇴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굴 현장 부근에 방을 하나 빌려 조사대원들이 함께 합숙하려고 했지만 부근에 마을이 없어 마땅한 방을 얻기도 불가능했다. 생각다 못해 현장 바로 옆에 있는 양계장(養鷄場) 집의 방 하나를 간신히 빌렸다. 닭들과 함께 한달을 보내야 했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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