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核, 미국은 대화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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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상원의 영향력 있는 중진의원 두사람이 행정부에 대해 군사적인 수단이 아니라 강력한 외교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북한은 동결돼 있는 핵 시설을 재가동하겠다고 선언하는 담화문에서 북한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핵 무기 개발이 아니라 미국과의 대화를 통해서 북·미관계를 개선하고 궁극적으로는 북한체제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부시 정부가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북한이 원하는 대화에는 응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불쾌하고 답답하다. 그래서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고 시인한 최초의 벼랑 끝에서 동결된 핵 시설을 재가동하겠다는 두번째 벼랑 끝으로 다가서고, 거기서 다시 동결된 핵 시설에 대한 봉인을 뜯겠다는 벼랑 끝으로 또 한발 내디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라크문제로 경황이 없기도 하고 북한의 벼랑 끝 전술에 말려들 의사가 없다는 생각까지 발동해 북한이 먼저 핵 포기를 선언하지 않으면 대화를 재개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미국은 두가지를 기다리는 눈치다. 하나는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의 카드가 소진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대통령선거가 끝나는 것이다. 만약 북한이 어리석게도 동결된 핵 시설의 봉인을 뜯거나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반원들을 추방하기라도 한다면 부시 정부로서는 크게 잃을 것은 없으면서도 군사행동을 포함한 강경한 대응조치를 취할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

미국의 이런 전략은 북한을 궁지로 몰 수 있다. 있는 카드를 다 썼는데도 미국이 대화에 응하지 않으면 핵 시설의 재가동에 착수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이 먼저 대화쪽으로 한발 먼저 다가서야 한다. 핵 포기를 먼저 선언하라는 요구 대신 대화가 재개돼 북·미문제를 일괄 타결하는 자리가 만들어지면 핵 포기를 선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선에서 미국이 양보하라는 것이다.

1970년대 북한이 핵 무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를 돌이켜 보자. 미국은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면서 오키나와의 기지에 보유하고 있던 핵 탄두들을 한국으로 옮겼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박정희 정부도 일단은 핵 무기 개발을 위한 초기작업에 착수했다.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 정권도 핵 무기 개발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북한·중국·소련의 북방 3각동맹이 확고할 때 개발을 시작한 핵 무기가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고 북·중, 북·러시아 관계가 군사동맹의 성격을 사실상 탈피한 지금은 북한의 안보에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런 이유에서 북한은 핵 무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없는 듯,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있는 듯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북한이 핵 무기에 관심을 가진 배경, 거덜난 북한 경제, 남북한의 국력의 격차, 유일한 수퍼파워로서의 미국의 전략무기 보유상황을 고려하면 북한이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지 않고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북한의 체제의 안전에 대한 관심은 경제적인 이해를 훨씬 앞선다. 경제적인 지원만으로 남북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오산이다.

미국의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조셉 리버먼은 부시 정부에 북한과의 대화를 촉구하면서 북한이 제네바합의에 따른 핵 시설 동결 약속을 잘 지킨 점을 지적하고 만약 제네바합의가 없었으면 북한은 지금 20개의 핵 무기를 가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핵 탄두 20개라는 숫자가 정확하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제네바합의를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북한의 핵 무기 포기선언을 대화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하는 한 지금의 핵 위기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생존전략을 보건대 미국은 북한의 핵 포기, 또는 그 전단계의 핵 포기 선언을 북·미대화의 조건이 아니라 북·미문제의 일괄타결을 위한 협상에서 얻어낼 최종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왜 미국이 한발 물러서야 하는가. 북한의 '핵 공갈'이 일전불사(一戰不辭)의 태세가 아니라 미국과의 협상에 대한 갈망의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떤 경우에도 한국과 한반도 주변국가들이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에 반대한다는 것을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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