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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가질수록 왜 허전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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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면

#장면 1:한 여성이 의사에게 묻는다. "새 집도 장만하고 차도 최신형으로 뽑았고 직장에서는 봉급도 올랐어요. 그런데 왜 기분은 엉망일까요?" 의사의 답변이 정곡을 찌른다. "어플루엔자(Affluenza)입니다. 끊임없이 더 많은 물질을 추구하는 신종 유행병이죠. 치료는 가능하지만 쉬운 것은 아니죠." 신간 『어플루엔자』 앞머리에 보이는 이야기는 풍요에 중독돼 쫓기듯 사는 우리 삶을 비춰보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장면 2:차가운 물살을 가르고 가는 타이타닉호 선원들은 저마다 분주하다. 승객들은 파티로 흥청거린다. 이때 빙산 충돌을 예견한 누군가가 "엔진을 멈추라!"고 외친다면? 그러나 무사태평주의자들, 그리고 배가 움직이지 않으면 일거리를 놓친다고 판단한 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현대적 삶을 움직이는 핵심 메커니즘인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대한 풍자를 위해 또 다른 신간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가 제시한 이야기다.

『어플루엔자』와 『경제성장이 안되면…』는 나란히 풍요에 중독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어수선한 세밑이 아닌가. 『경제성장이 안되면…』가 우리를 움직이는 관성(慣性)자체에 정면으로 딴지를 거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로 들린다면, 『어플루엔자』는 '자발적 단순함'으로 되돌아가려는 미국사회의 트렌드를 반영하는 구체적인 지침으로 읽힌다.

우선 『어플루엔자』에서 '어플루엔자'란 풍족(Affluence)과 유행성 감기(influenza)의 합성어. 특히 미국에서는 이 유행병이 연말 쇼핑 시즌에 불어닥쳐 사람들을 혼미하게 만든다. 가구당 부채가 3천만원에 달하고 카드빚 때문에 사회문제가 불거지는 한국에도 어플루엔자는 맹독성 질병인지 모른다.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듀크대 교수인 『어플루엔자』의 저자들은 인터뷰 등을 통해 미국인들의 과소비 증상을 고발하고 있다. 쇼핑 카트 두개를 가득 채우고도 새 물건을 찾아 '메가몰'(쇼핑몰 여러개를 합쳐놓은 초대형 쇼핑센터)을 헤매고 있는 부부, 한 주에 쇼핑은 여섯시간을 하면서도 아이들과는 40분밖에 놀아주지 않는 미국인들….

문제는 이들이 쇼핑 중독을 쇼핑으로 치료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향정신성 약품처럼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없다는 게 이 책의 입장이다.

『어플루엔자』가 개인의 과소비 증후군을 진단한 책이라면 『경제성장이 안되면…』는 이 문제를 국가·사회 문제로 더 깊고 넓게 보며 우리 삶의 근본적 성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타이타닉호 승객들의 흥청망청만을 따질 게 아니라 "배는 꼭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발전 이데올로기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미국인으로 일본 쓰다(津田塾)대학 정치학 교수를 지내며 『래디컬 데모크라시』등 사회비판서를 펴낸 경력의 저자 러미스는 선진공업국들이 자원 소비를 90% 감소시키지 않으려면 지구같은 행성이 다섯개는 필요하다며 발전 엔진을 멈출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밝히듯 이런 주장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1972년 로마클럽이 과소비와 환경오염이 지구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다고 경고한 『성장의 한계』란 보고서를 낸 이후 인류의 의식이 몇발짝 나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파국에서 벗어나려면, 파이의 크기를 늘려 빈국·빈자들에게 돌아갈 몫도 키우자는 감언이설에 속지 말고,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대항발전'을 하자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사회 속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줄여 나가도 사람들은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별 탈없이 살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 왔으면서도 여전히 과로와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그는 텃밭 가꾸기와 재봉일을 권한다. 서비스와 상품 구입 대신 자신의 손재주를 기르라는 것이다.

각각 개인과 사회의 문제로 출발을 달리 했던 두 책은 결론에 이르러 합일점을 찾는다. 소비 중독증에 벗어나기 위해 신용카드부터 잘라 버리고, 친환경적인 생활을 하라는 『어플루엔자』와, 돈을 시간으로 바꾸고 자급자족 방식을 강구해보라는 『경제성장이 안되면…』는 개인의 변화로 세상을 바꿔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홍수현 기자

shinn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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