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일본이냐… 가족있는 北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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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소가 히토미(曾我ひとみ·43).

여고 시절 북한에 납치됐다가 지난 10월 2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요즘 착잡한 심정이다. 꿈에 그리던 고향 땅에서 가족·친지를 만난 기쁨도 잠시. 북한에 남겨둔 남편과 두 딸 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함께 귀국한 다른 두 일본인 부부도 사정은 비슷하다. 당초 2주로 잡혀 있던 이들 납북 일본인의 고향 방문 일정은 "돌려보내면 두번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여론과 "납치된 자국민을 또다시 상대국에 돌려보내는 법은 없다"는 일본정부 방침에 따라 무기한 연기됐다. 귀국 후 첫 한달은 연이은 환영 행사로 눈코 뜰 새 없었다. 공식 기자회견은 물론 고향 마을의 환영 행사에도 일일이 참석해야 했다. 동창회에서는 40대의 중년으로 변한 친구들과 만나 가슴에 묻어둔 24년의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몰랐다. 일본 정부는 실종 처리됐던 그의 호적을 바로잡고 여권을 만들어줬다. 모교인 사도(佐渡)고등학교도 졸업을 석달 앞두고 납치됐던 소가에게 뒤늦게 졸업장을 수여했다.

니가타(新潟)현의 작은 섬마을 사도에서 태어나 자란 소가의 인생이 뒤바뀐 사건은 1978년 8월 12일 일어났다.

소가와 어머니(소가 미요시·당시 46세)는 오본(お盆·일본의 양력 추석) 준비를 위해 집에서 가까운 가게에 장보러 갔다가 납치됐다. 소가는 "낯선 남자들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어머니와 내 머리에 부대자루를 씌워 어디론가 끌고 갔다"고 진술했다. 당시 소가의 아버지는 사고로 다리를 못쓰게 된 상태였고, 소가는 병원의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 야간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후 소가는 북한의 한 '초대소'에 머물며 북한말 교육을 받았지만 어머니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북한 언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한 교육관이 "이번엔 영어를 배워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녀는 자기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영어강사 찰스 로버트 젠킨스(월북 미군)와 친해져 80년 8월 결혼했다.

소가가 북한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식 확인된 것은 지난 9월 북·일 정상회담에서였다. 정상회담 후 생존 일본인들의 고향 방문이 성사되는 등 북·일 수교협상은 순탄해 보였다.

그러나 10월 말 재개된 수교 협상은 "납치 문제를 먼저 해결하자"는 일본의 주장과 "경제협력이 우선"이라는 북측 주장이 부딪쳐 아무런 진전없이 끝났다. 이후 불거진 북한 핵문제는 양국 관계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북한에서 날아온 가족들의 소식은 소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남편 젠킨스와 두 딸이 한 일본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하루빨리 돌아오라"고 호소하더니 최근엔 남편이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남편의 입원 소식을 들은 소가는 "일본 정부의 결정에 따르겠다"면서도 "어디서든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19년간 태어나 자란 고향 일본과 24년간 생활하며 가족까지 이룬 '납치범 국가' 북한 사이에 끼인 소가의 비극을 과연 누가 어떻게 풀어줄 수 있을까.

박소영 기자

oliv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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