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약수맛 같은 분 없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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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산에 오른다. 밤새 내린 눈으로 천지가 온전히 하얗다. 해는 아직 떠오를 생각이 없는가보다. 코끝을 스치는 새벽 바람이 매섭다. 간간이 흩날리는 눈보라가 얼굴을 친다. 좀처럼 온기를 느낄 수 없다.

어느덧 산의 중턱이다. 아, 해가 떠오른다. 또다시 새 날이 열린다. 죽은 듯이 숨어 있던 풍경들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아침 햇살의 온기가 산 전체를 껴안는다. 돌도 풀도 나무도 낙엽도 산새들도 일제히 소리 높여 아우성치는 것 같다. 약수터에서 마시는 한 모금의 약수, 이 상쾌한 맛! 하늘을 본다. 어쩌면 저렇게 맑은 청색이 있을 수 있을까. 일순, 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도 정지한 듯한 청색의 심연으로 빨려든다.

뒤돌아 산 아래를 본다. 이곳에서 보니 거대한 수도 서울이 겨우 한 손바닥 안에 잡히는, 작고 예쁜 마을에 불과하구나. 가난뱅이도 부자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모두 그저 평등하구나. 햇빛 아래 그저 다소곳하구나.

자신도 결국 자연 속의 한낱 보잘것없는 미물임을 발견하는 순간처럼 거룩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자연 앞에 서면 누구나 겸손을 배운다. 들에선 누구나 땅의 자식임을 알게 되고, 바다에선 검푸른 물빛에 두려움으로 낮아지고, 바람 앞에선 영혼을, 신을 감촉한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자연의 겸허함을 깨닫고 있는 후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 잘 났다고 야단일 뿐 겸손과 겸양으로 전일화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북한과 미국의 핵 갈등을 둘러싼 한반도의 위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선택을 강요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와 미사일 등의 살상무기를 보유한 미국이 국가적 생계를 위해 미사일을 수출하는 북한의 선박을 국제법까지 무시하면서 불법으로 나포했다가 다시 풀어주는 해프닝을 벌이자 북한은 이에 질세라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함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아주 어렵게 가닥을 잡아가던 한반도의 평화기조가 다시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나는 이러한 위기를 보면서 이 문제를 풀어갈 해법의 하나로 오는 19일의 대선을 꼽고 싶다. 강자의 편에 붙어 그 힘에 기생하면서 비겁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당당하게 우리의 주의·주장을 내세울 것인가. 지난날 우리의 대통령들은 민족문제에 있어 미국의 눈치를 보았다. 미국의 힘의 논리에 기생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촛불시위에서 보듯 미선이와 효순이의 억울한 죽음을 둘러싼 SOFA 개정을 요구하는 국민의 열망에 이제는 눈을 돌려야 할 때다.

'대통령 만능주의'시대는 지나갔다. 이젠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은 용인되지 않는다. 대통령은 한낱 심부름꾼일 뿐이다. 우리가 대통령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뜻으로 대통령이 움직이고, 따라서 국민 모두가 대통령인 셈이다.

자연의 겸손함을 닮아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남북문제를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며 평화롭게 해결하는 사람, 깨끗한 환경을 보존할 수 있는 사람, 소외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사람,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아! 여전히 바람은 차구나. 그래, 겨울은 추워야지. 추위에 맞서보자. 땀 흘려보자. 그리고 한 모금의 약수를 마셔보자. 그런 사람, 새벽 약수 맛 같은 사람, 어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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