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在日학자 전호천씨:"北 전시품 준비에 75일 밤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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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난 6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3층 특별전시장에서 막을 올린 '특별기획전 고구려!-평양에서 온 고분벽화와 유물'은 막바지까지 숨가쁜 순간들을 거쳤다. 준비 과정에서 여러 차례 무산된 전례에 비추어 관계자들을 애태웠던 '고구려!'전은 재일 학자 전호천씨와 화가 홍영우씨, 주최측인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 조성우 운영위원장의 뚝심으로 남북 교류사에 새 길을 열었다. 이들을 만나 전시 성사에 얽힌 뒷얘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전호천(全浩天·71)씨는 '고구려!'전을 보려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칠십 평생에 첫 조국 나들이를 한 그였지만 고향이 함경도라고 말했다. 1931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으니 그가 얘기한 고향 함경도는 선친이 일제 시대에 배고픔을 참다 못해 유랑길을 떠났던 그곳을 말함이다.

"따뜻한 인심에 감격했습니다. 그야말로 가족같이 대해줘서 옛날 알던 동무들을 만난 기분입니다. 공주·부여·경주를 둘러봤는데 직접 와서 보니 논문을 통해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군요. 무덤 하나를 봐도 그 생동감과 박력이 대단합니다. 자주 오고 싶습니다. 고고학은 현장이 중요한데 남북 학자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를 일러 사람들은 이번 '고구려!'전의 '오작교'라 했다. 까막까치가 다리를 만들어 견우 직녀를 만나게 했듯, 북한 유물을 서울에 오게 해 남북을 잇는 화해의 길을 냈다는 비유다.

"십수년 전부터 고구려전을 하고 싶다는 남한 쪽 뜻을 북한에 전달했으나 여기저기서 탁탁 막혀 속이 탔어요. 제 전공이기도 하지만 고구려가 민족 공통의 분모로서 남과 북 사이에 맺힌 분단 반세기의 매듭을 하나씩 풀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전씨는 학자들과 관람객들을 만나면서 더 절실하게 이 소명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업에 남은 인생 전부를 바쳐야겠다"는 표현을 썼다. 일주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일생을 뛰어넘는 진한 핏줄이 쓰였다고 했다.

"어째 이런 분들과 이렇게 헤어져 살고 있는가, 멍멍하더군요. 이 벽을 뚫고 나가는 데 고구려가 디딤돌이 되겠구나 확신했습니다. 제가 북에 있는 고구려 무덤벽화를 둘러 봤는데 서울에 내려올 복원품을 만드는 북한 관계자들 정성이 참 놀라웠어요. 관련 학자들이 다 모여 어떻게 하면 과학적으로 제작할까 몇 차례씩 회의를 열고, 화가들이 무덤을 드나들며 의논해서 작업을 하고 나면 학자들이 다시 검토하고 심사하는 과정이 눈물겹더군요."

지난 10월 초에 남한 전시가 확정된 뒤 남포항에서 배에 실어보낼 때까지 두달 보름에 걸쳐 학자·화가·기술자·학생 수백명이 밤낮 없이 전시품 제작에 달라붙었다는 것이 전씨의 현장 보고다.

"남북 학술교류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산전 수전 겪고 나서도 다시 산넘어 산이랄까요. 성심성의껏 문제를 제기하면서 단념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하나씩 하나씩 거듭해서 꽉 맺히고 엉킨 끈을 푸는 심정으로 달라들어야 될까말까죠. 이건 북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민화협은 '고구려!'전으로 역사에 큰 일을 한 셈입니다."

홋카이도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전씨는 70년대 초부터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원에서 고구려사를 전공해 고고학박사 학위를 땄다. 92년 일본에서 고고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들과 이 분야에 관심있는 일반인 등 80여명을 모아 재일본조선력사고고학협회를 결성해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11일 일본으로 떠나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북한 학자들의 남한 방문을 이루려 간다"고 했다. "그들이 오지 못한다면 여기서 학자들이 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글=정재숙·사진=최승식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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