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경희대생, 교내 백혈병 경비원 돕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저희 왔어요. 좀 어떠세요. "

"또 어쩐 일이야. 공부하기도 바쁠텐데…. "

지난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병실. 무료하기만 했던 백혈병 환자 백호현(48)씨와 그를 찾아온 젊은 손님들이 반갑게 인사말을 나눴다. 白씨의 얼굴엔 잠시나마 고통을 잊은 듯 웃음이 피어올랐다. 병상을 지키느라 지쳐 있던 白씨의 딸 영주(18)양도 언니·오빠의 방문에 활력을 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 젊은 손님들은 白씨가 근무하는 경희대 총학생회 간부들.

白씨는 반평생 가까이 경희대를 지켜온 경비원이다. 1981년 이 일을 시작해 21년 동안 정경대·음대·의대·본관·박물관 등의 안전을 책임졌다. 현재는 문리대 소속이다. 오래 동안 학교에 있다보니 졸업 후 학교를 찾은 동문들이 먼저 "저, 기억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넬 정도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 인사다.

"내가 해준 게 뭐 있나. 학생회실에서 몰래 술 마시거나 사용 못하게 돼 있는 전열기구를 들여올 때 무조건 혼내기 전에 잘 타이르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면 슬쩍 눈 감아주곤 하니까 학생들이 아는 척해주는 거지. "

白씨가 털어놓은 인기 비결이다.

이런 白씨가 입원한 것은 2주 전. 하지만 병마가 찾아든 것은 98년 겨울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다가 만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것이다.

당시 담당 의사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지만 한달에 1백여만원씩 든다는 입원·치료비 부담과 자식(1남1녀)들의 장래 때문에 일을 그만 둘 수 없었다. 그래서 白씨는 2주마다 검진을 받고 매일 약을 먹으면서 출근해왔다. 3일에 한번씩 돌아오는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그에겐 무리였다. 지난달 말 의사는 "만성이 급성으로 바뀌었다. 본격적인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치료비가 월 1천여만원에 이른다. 골수기증자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항암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다. 백혈병 판정을 받고부터 부인 강경숙(47)씨까지 식당 일을 다녀 돈을 모았지만 도저히 능력 밖이었다. 고3인 딸은 괜찮은 수능 점수를 받아놓고도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절망이 깊어가던 白씨 집안에 뜻밖의 '캠퍼스의 온정'이 찾아들었다. 白씨가 보이지 않아 궁금해하던 문리대 학생들이 다른 경비 아저씨들에게 白씨의 딱한 사연을 전해 들었고 이 얘기는 곧 총학생회에 전달됐다.

총학생회는 "경희 가족의 어려움을 두고 볼 수 없다"며 즉각 소매를 걷어올렸다. 학생들은 이달 초부터 학생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런 사실을 알린 뒤 각 건물에 병원비 모금함을 설치했다.

쉬는 시간에는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마이크를 잡고 모금을 독려했다. 白씨가 계속 헌혈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선 적십자측에 요청해 지난 5, 6일 학교로 헌혈차를 부르기도 했다.

학생들의 노력은 학교 당국을 감동시켜, 지난 주말부터 교직원들도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9일 학생들이 白씨를 찾은 것은 모금액이 7백만원을 넘었고 헌혈증 2백여장에 혈소판 기증자도 7명이나 구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아저씨가 안 계시니 학교가 썰렁해요. 다음에 찾아 뵐 때까지 몸조리 잘 하세요. "

白씨는 이렇게 말하며 병실을 나서는 학생들에게 "빨리 나아서 꼭 학교에 다시 나가겠다"는 다짐의 말을 건넸다.

남궁욱 기자

periodista@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