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든 광화문 아이들 초롱한 눈빛 속 자신감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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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 주말 아이들이 광화문 네거리에 모였다. 어둡고 추운 겨울 저녁을 밝히려고 한 손엔 촛불을 켜 들고, 한 손은 친구들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 왜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고 왜 이렇게 굴욕스러운 감정이 감춰지지 않는지를, '애국가'와 '아리랑'과 '아침이슬'을 부르며 묻고 싶어한다. 촛불은 아무 것도 모르고 종이컵 속에서 깜박일 뿐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광화문에 모인 아이들의 얼굴엔 웃음도 가득했다. 어느 남자 고교생은 함께 온 여자 친구의 손등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주었다. 미소가 얼굴 가득히 번졌다. 손에 손을 잡은 그 아이의 눈빛은 반짝였다. 촛불은 미선이와 효순이를 지켜주겠다는 두 아이의 약속이었다.

그날 광화문 네거리는 사랑의 힘이 모든 쇠붙이를 녹이는 현장이었다. "우리는 끝까지 함께 한다." "우리는 승리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 가사를 잊어버린 아이들은 허밍으로 따라했고, 그러다 마주보고 깔깔깔 웃어 젖혔다. 촛불은 조용히 타고 피켓은 아이들 특유의 재치로 꾸며져 있었다.

잘못했으면 직접 사과하라고,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고. 아이들은 속내에 뭔가를 감춰놓지 않았다. 아이들은 솔직했다. 놀랍게도 자신에 차있었다. 당당하게 자신들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했고, 진심이 통한다면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힘 없는 아빠는 '조금 참자, 그래 누군가는 참아야 잘 지낼 수가 있지' 하며 타이르겠지만. 촛불은 부유하는 꽃처럼 아이들 머리 위에 조용히 흘러 다닌다. 힘 없는 아빠의 아이들이 맨 처음 배우는 것은 참는 것이고 자신이 조금만 참으면 힘 없는 아빠를 비롯한 온 동네가 그럭저럭 지낼 수 있기에 웬만한 일에는 양보하며 지내온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참을 수 없다고 나가서 시위라도 하자고 한 것이다.

아빠는 "얘들아 너희는 아직 현실을 모르는구나, 현실은 늘 부자편이란다. 가난한 아빠의 현실은 가혹한 것이고 이러다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르고, 아빠가 수출한 물건이 전부 반품될 수도 있고 이러다가, 무슨 경제적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단다."

노래를 부르며 조용히 길을 비켜달라고 평화 시위를 보장해 달라고 초롱초롱한 눈길로 모여 촛불을 들었다. 아이들의 감정은 뜨겁지만 아빠는 그 감정이 거추장스럽고 당혹스럽다. 감정은 다스려야 하고 현실은 직시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 준다.

그러나 아이들은 감정의 힘이 아니라면 어떻게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겠냐고 말하려 한다. 아이들은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인내한다고 해서 다른 세계가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촛불을 켜들고 서 있다. 우리와 미국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라도 좋은 사이를 유지해야 하는 우방이지만, 그러나 좋은 사이라는 것이 어느 한편이 자존심을 버려야 유지되는 것이라면, 좋은 친구라는 것이 어느 한쪽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사이, 힘의 논리로만 균형이 유지되는 사이라면, 그만 두자고, 자존심을 지키자고, 그래서 촛불을 켜들고 서 있다.

◇최정례 시인은=1955년 생으로 고려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90년 등단한 뒤 시집 『내 귓속의 장애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등을 내며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99년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고 올해 미당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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